요즘 매일 독일어학원을 간다. 우리반에는 아르헨티나, 인도, 튀르키예, 이스라엘, 스페인, 러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있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공통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모두에게 처음인 독일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방법은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첫 시간, 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 다시 한번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
그다음 작은 공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Ich heiße Ago).” 그리고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Wie heißen Sie)?” 공을 받아든 학생은 어리둥절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자 아고는 다시 공을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 그리고 다시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 몇번을 왔다갔다 하고서야 교실에 있던 우리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쉬 하이스 크리스티나.” 그리고 이름이 궁금한 상대에게 공을 가볍게 던졌다. “뷔 하이센 지?” “이쉬 하이스 미나.” 공 던지기 툭. “뷔 하이센 지?”
이쉬 하이스 알렉산드로. 뷔 하이센 지? 이쉬 하이스 하산. 뷔 하이센 지? 이쉬 하이스 마리아. 뷔 하이센 지? 이쉬 하이스 요세프. 뷔 하이센 지?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에게 세 번 정도 자기 차례가 돌아갔다. 우리는 최소 60번에 걸쳐 두 개의 표현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확실하게 알아갔다. 이쉬 하이스 ○○은 나의 이름을 소개하는 표현이다. 뷔 하이센 지는 낯선 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표현이다.
수업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더디게 익혔다. 누군가 빨리 익힌다고 칭찬하거나 진도가 빨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더디게 익힌다고 선생님이 인상을 찌푸리는 일도 없었다. 느긋하게 진행되는 매일의 시간 속에서 나는 때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아고는 짜증을 내지 않는구나. 아고는 자신이 반복해서 가르쳐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구나.
수업을 듣기 위해 선행학습을 할 필요도, 끝나고 뒤늦게 이해하느라 절절맬 필요도 없었다. 빠짐없이 출석만 한다면 수업시간 내에 소화가 가능했다. 수업에서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왜 긴장했던 걸까? 그것은 내게 오랫동안 수업시간이란 무언가를 배우는 시간이라기보다는 평가받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유명해져보고도 싶었고 사업도 크게 해보고 싶었다.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저축액도 얼마간 쌓이자 물욕은 급격히 줄었다. 책을 내며 얼마간 독자가 생기자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결핍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나서야 내가 원했던 것이 돈이나 명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것이었다.
거의 늘 우등생으로 지냈지만 학창 시절은 여전히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오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악몽을 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성과별로 줄 세우고,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일은 칭찬받지 못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두 경우 모두 조건부 사랑을 약속하는 셈이니까.
이제는 누군가의 빛나는 재능을 보면 뒤에 숨은 짙은 그림자가 동시에 그려진다. 감탄하다가도 안쓰러워진다. 재능은 대체로 한 개인의 생존법으로서 개발되므로. 나는 수업을 듣다가 몰래 상상한다. 뛰어난 누군가를 추켜세우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면. 누구든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개와 고양이가, 자갈과 모래가, 봄비와 라일락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