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87〉 류더잉 베이징대 혁신창업센터 원장

인공지능(AI) 가성비 혁신을 내세운 딥시크, ‘휴머노이드계 딥시크’라 불리며 LG전자의 투자를 끌어낸 즈위안(智元) 로봇. 중국의 과학기술 굴기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들은 모두 최근 2~3년 내 세워진 스타트업이다. 갓 태어난 회사들이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배경에는 달라진 중국의 창업 분위기가 있다. 지난달 17일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회관에서 만난 류더잉(劉德英·49) 베이징대 혁신창업센터 원장은 “‘취업 안되면 창업하라’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로 너도나도 스타트업을 차려 거품이 끼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요즘은 아니다”라며 “입증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탄탄한 사업을 펼치려는 알짜 창업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과학기술 역량 세계 1위
연구 성과 기반 창업이 대세
중관춘 투자자, 대학 연구 주목
대학은 교수·학생 창업 지원

재학생·졸업생을 대상으로 창업을 지원하는 베이징대학 혁신창업센터(北京大學創新創業學院, 이하 ‘센터’)는 2017년 문을 열었다. 리커창 당시 총리가 창업을 통한 신성장 동력 확보를 국가 전략으로 정하면서, 대학가에서는 스타트업 창업 바람이 불었다. 류 원장은 “창업 붐(열풍)이 불었던 센터 초창기엔 사업 모델만 있으면 누구나 회사를 차렸고, 그만큼 거품도 심했다”고 회상했다. “이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과학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창업을 하는 것이 대세가 됐고, 대학의 창업 지원도 그에 발맞춰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있어야 창업 가능한 중국
창업 거품은 어떻게 꺼졌나.
“센터가 설립된 2010년대 중후반 유행하던 창업은 주로 비즈니스(사업)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공유자전거 회사 ‘오포’(OFO)다. 베이징대 학생이 세웠던 이 회사는 ‘작은 노란 자전거(小黃車)’ 대여 서비스라는, 당시로서는 신선한 사업모델을 제시했다. 하나의 산업을 키워냈을 정도로 혁신적이었지만, 시장에 대형 자본들이 들어오면서 회사는 제대로 대응 못 했고 파산했다. 사업모델만으로는 혁신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사회가 점차 깨닫게 됐다. 자연스레 창업 거품은 꺼졌다.”
요즘은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
“이제는 양보다 질이다. 사업모델만 들고 누구나 쉽게 도전하던 과거와 달리, 연구로 입증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한다. 중국은 3년 전부터 과학기술 연구 역량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지표 ‘네이처 인덱스’에서 미국을 제치고 줄곧 1위를 차지해 왔다. 대학 위주로 과학기술 연구 성과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기반으로 한 창업이 많아졌다.”
인기 있는 창업 분야는.
“주된 창업 분야는 사실 투자자들 관심과 선호에 따라 바뀐다. 몇 년 전만 해도 바이오 분야가 인기였지만 지금은 단연 AI 분야다. 투자한 뒤 수익을 내고 회수하기까지 주기가 긴 편인 바이오에 비해, AI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서 투자가 많고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운 편이다.”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은 센터와 어떻게 협력하나.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몰려있는 베이징 중관춘의 투자기관들은 우리 대학의 과학기술 연구 성과를 늘 주시한다. 사업화할 만한 성과에 대해서는 해당 교수와 직접 연락해 비즈니스를 논의하기도 한다. 다만, 대학교수들은 대부분 사업화 자체가 연구에 방해가 될까 봐, 혹은 스스로가 비즈니스에 전문성이 없다는 점을 걱정한다.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잘 아는 학생들을 양성하고, 그들에게 비즈니스까지 가르치는 것이 센터의 목적이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창업이 교수와 학생이 공동으로 회사를 차리거나 문·이과 학생들끼리 힘을 합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띠는 이유다.”
중관춘은 베이징대·칭화대를 필두로 한 대학가와 기업, 연구소 등이 모여 형성된 중국 내 제1 혁신클러스터다. 대학의 연구 성과와 벤처 자본, 창업 인프라가 긴밀히 연결돼 신산업 생태계의 출발점 역할을 한다. 올해 중관춘 연례회의에서 발표한 ‘2025 중국 유니콘 기업 발전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총 409개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 중 베이징 소재(115개)는 30%에 육박하며 전체 지역 중 1위다.
중관춘 투자자들이 찾는 대학 창업 대회
류 원장은 “창업에는 기술과 자금, 그리고 인재(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학은 기술을 갖고 있고, 중관춘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팀을 꾸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창업 인재가 없으면 비즈니스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센터는 (대학과 중관춘 사이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베이징대 학생처 등 줄곧 학교에 있었던 류 원장은 2022년 센터 부임 후 조직 편제부터 예산·인력 등 구조를 꾸리는 데 집중했다. 그해 센터는 중국에서 첫 번째로 국가급 혁신창업센터로 선정됐다. 중앙정부가 ‘국가급’으로 인정한 창업센터는 현재 중국 전체에서 약 100개 정도다. 5년간 연간 500만 위안(약 10억원)을 지원받는다. 그는 “과학기술 기반 창업이 뜨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지원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며 “센터는 창업 새싹들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센터는 어떤 지원을 하나.
“크게 머리-손-다리, 3단계로 나뉜다. 머리(둥나오, 動腦) 단계에선 학생들에게 창업 아이디어를 심어준다. 중국 의료보험국 국장, 베이징대 출신 변호사 등 외부 인사를 초빙해 강의를 열고 전공·학위 과정 무관하게 공개한다. 손(둥서우, 動手) 단계에선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한다. ‘창업 주유소’(재학생), ‘인큐베이터’(동문) 등 실험실이나 법인 주소로 등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다리(둥투이, 動腿) 단계에선 시장에 본격 진입할 수 있도록 학교 밖에서 투자자와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투자자와 만나는 기회가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국가 또는 학교에서 지정한 예산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창업 대회’를 통해 창업 지망생들과 시장의 접점을 넓힌다. 예를 들어, 지난해 열린 ‘우한컵’은 우한시에서 자금을 댔다. 베이징대 재학생과 5년 이내 졸업생이 참가 대상이었는데, 132개 팀이 참여해 5개 팀이 우한시에 회사를 설립하는 좋은 성과를 냈다. 지역은 양질의 창업으로 경제가 활성화되니 좋고, 우리는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얻으니 좋다.”
대회가 창업 등용문인가.
“그렇다. 창업 대회에서 훌륭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투자자들이 잘 알고 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제 1회 AI 캠프 시연 발표회엔 투자자 100명이 자진 신청해서 왔을 정도로 큰 인기였다. 학생들은 대회를 통해 투자받고, 또 사업화에 성공하면 국가적 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 혁신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기업들은 국가에서 키우는 ‘국가급 전문 중소기업’으로 선정돼 세금 감면 등 혜택을 받기도 한다.”
베이징대는 전통적으로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이 강한데, 과학기술 창업에선 어떤 경쟁력이 있나.
“우리는 확실히 인문계 전공이 강하다. 이로 인해 가끔 자연과학 분야가 가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공계라고 하지만, 이과와 공과는 다르다. 베이징대의 이과, 즉 자연과학 분야는 처음부터 강했다. 공과대는 칭화대 등 일부 강한 대학도 있지만, 정보통신·로봇·AI 등 최근 주목받는 분야는 기본적으로 같은 출발선 상에서 시작했고 자연과학이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AI는 수학, 배터리는 재료과학이나 화학, 바이오는 생물학 등 대부분이 자연과학에서 출발한다.”
류 원장은 “창업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사례를 보면 대부분 자연과학 학과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훌륭한 연구가 창업 대회에서 빛을 볼 수 있게 투자자를 사로잡는 발표(PT)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친다”며 “이렇게 인재를 양성하고, 양질의 대회를 유치해 창업 사례를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등 해외에서 창업 대회를 여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

류 원장은 오는 9월 10~11일 대전 KAIST 캠퍼스에서 열리는 ‘2025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 국제포럼’에 참석차 방한한다. 이번 심포지엄은 ‘혁신창업 클러스터의 길’을 주제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대기업 뿐 아니라 연구개발(R&D)에 바탕을 둔 혁신기술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다. 미국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중국 중관춘 등 국내외 주요 클러스터 담당자가 참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