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갤러리 한 코너에 검은 옻칠 자개장이 놓여 있다. 할머니 자개장에 있는 십장생도가 아닌 경쾌한 팝아트가 나전으로 새겨져 있다. 장에서는 힙합과 R&B 뮤직이 흘러나온다. MZ세대에게 인기 많은 미술가 샘바이펜(33·본명 김세동)이 만든 오디오장이다. “작가가 아무도 안 사면 자신이 갖고 있겠다며 만들어 내놓더라고요. 누가 살까 했더니 전시 시작되자마자 유명 래퍼가 샀답니다.” 샘바이펜의 개인전을 진행 중인 PKM 갤러리 박경미 대표의 얘기다.
K팝 성공과 맞물린 힙트래디션
3~4년 전부터 ‘힙트래디션’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멋지고 트렌디하다’라는 뜻의 ‘힙(hip)’과 ‘전통’을 뜻하는 ‘트래디션(tradition)’이 합쳐진 신조어로서, MZ세대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것을 현대 문화와 생활용품에 응용하고 즐기며 그것을 쿨하게 여기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신조어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것은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 중에서 반가사유상 미니어처가 열풍을 일으키면서였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의 작업실에서 이 미니어처가 포착되면서 품절 사태까지 빚었다.
팝아트 자개장, 한옥 카페 등
MZ세대의 전통 사랑 여전
다른 문화 섞일 때 역동성 생겨
피상적 전통 접근은 지양해야

이처럼 힙트래디션 현상은 K팝의 세계적 성공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BTS처럼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밴드들이 한국의 전통적 요소를 자신들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무대의 비주얼 콘셉트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럼으로써 해외 팬에게는 이국적이고 참신한 미감으로 이목을 끌고, 국내 팬에게는 ‘우리 옛것을 멋지게 재창조하다니 바람직하다’는 호감을 얻어왔다. 최근의 예로는 블랙핑크 멤버 제니가 지난 1월 발표한 솔로 앨범 곡 ‘젠(Zen)’이 있다. 신라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서, 뮤직비디오에서 제니는 신라 천마총 새날개 모양 금관장식 형태의 대담한 톱을 착용하고 있었다.
대중예술뿐만이 아니다. 반짝인기에 그칠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과 달리 한옥 카페는 성업 중이고 ‘창덕궁 달빛기행’ 같은 고궁 특별 투어는 ‘피켓팅(피가 튀길 만큼 치열한 티켓팅)’이 이어지고 있으며 제사상에서 카페로 옮겨온 약과의 인기는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스타그램 같은 사진 기반 소셜미디어의 힘이 크다. 힙트래디션을 즐기는 사진은 시각적으로 예쁜 데다가 ‘우리 전통을 좀 안다’는 지적·민족주의적 과시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재미나 과시를 위해 피상적으로 소비한다” “결국은 전통문화가 상술에 이용될 뿐이다” 등의 비판이 나온다.
그에 관해서 기자는 2016년에 ‘전통이 재미있으면 하지 말래도 한다’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힙트래디션’이란 단어가 생기기 전 그 현상의 시작이었던 고궁과 삼청동 일대 한복 체험자들 출현에 대한 글이었다. 그들에게 체험의 이유를 물으니 “예쁘고 재미있어서”였으며, “한국 전통문화를 배우고 알리기 위해”라는 대답은 없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기자는 “오히려 재미를 위해서이기에 지속적”일 것이며 “그 재미가 진지한 탐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내외국인의 한복 체험은 올해에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제 단순히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는 놀이에 그치지 않고 전시와 책, 동영상 콘텐트를 통해 한복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라(羅·고려시대 직물), 빛을 엮다’ 전시를 진행 중인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의 옛 직물·의류 복원 프로젝트가 최근 더욱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제3의 공간’ 만들어내는 문화번역

물론 지금 고궁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입고 있는 대여 한복은 상당히 혼종적이고, 이것이 전통을 파괴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번역(cultural translation)’ 과정의 불가피한 파생물이다. 문화번역은 좁은 의미로는 글을 번역할 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의역을 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로는 한 문화의 콘텐트가 다른 문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의미가 재구성되는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문화학자인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는 문화번역이 “서로 다른 문화가 마주쳐 혼종적이고 역동적인 ‘제3의 공간(Third Place)’이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힙트래디션은 이러한 문화번역과 그로 인한 ‘제3의 공간’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화번역은 ‘한국과 미국’ 같은 서로 다른 공간의 문화간 번역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한민국’ 같은 서로 다른 시간의 문화간 번역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자신의 대표 연작인 ‘번역된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는 세계적인 미술가 이수경의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현대 도예가들이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면 깨뜨리는 것을 보며 자신의 연작 ‘번역된 도자기’의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 깨뜨리는 행위는 일종의 완벽한 ‘번역’, 즉 전통 도자기를 현대에 옮겨오는 데 필요한 중대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듯 했다. 하지만 ‘완벽한 번역’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나는 전국 각지 가마를 돌아다니며 그런 도자기 파편을 모아 조합해서 나 나름대로 전통의 번역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이 전통의 ‘재해석’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불편하다. ‘재해석’을 할 만큼 전통을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게 그것은 신비롭고 모호한 대상이다. 차라리 내 작품은 전통의 변종, 하이브리드 잡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말은 힙트래디션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고급 예술’에 속하는 이수경 작가의 작품부터 대중문화의 힙트래디션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전통의 재림이나 재해석이라기보다 혼종이며 그 자체로 새로운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새롭게 구성되고 변화하는 정체성은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전통문화의 원형을 고집할 필요는 없으나 그것을 피상적이지 않게 깊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재창조와 새로운 정체성을 풍부하게 한다. 왜냐하면 전통문화를 깊이 알수록 거기에서 미처 몰랐던 창조적 아이디어와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박물관과 미술관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미술관들이 선보이고 있는 고미술 전시의 열풍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