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작품이 제 발을 멈추게 하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인 건 몰랐고 작가의 출생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까 무척 궁금해지네요.”
24일(현지 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대표 명소 네이비피어(Navy Pier)에서 열린 ‘2025 엑스포 시카고’에서 만난 제임스 호크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 윤형근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다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카고 외곽에 거주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호크와 동행한 동료 로리 앨런 역시 “단순하면서도 정직한 구도의 느낌이 좋아 가격만 맞으면 구매하고 싶다”며 작품을 소개한 갤러리박(BHAK)의 부스 번호를 여러 차례 곱씹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인 엑스포 시카고가 이날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나흘 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시카고 아트페어는 과거 ‘아트 시카고’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 중반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운영 실패 등으로 2011년 막을 내린 뒤 이듬해 엑스포 시카고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 지역의 풍부한 문화 유산과 수준 높은 미술·박물관 인프라를 토대로 미국 내 입지를 다져가는 중이다. 특히 지난해 매머드급 아트페어 브랜드 ‘프리즈(Freize)’에 합류하며 미국을 넘어 글로벌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실제 올해 엑스포 시카고는 첫날만 봐도 규모와 관람객 면에서 지난해보다 20~30% 성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엑스포 시카고의 또 다른 특징은 전시장을 채운 170개 갤러리 중 10%가 넘는 20곳이 한국의 갤러리라는 점이다. 프리즈를 매개 삼아 한국화랑협회와 엑스포 시카고가 협업을 결정하면서 이뤄낸 쾌거다. 과거 일부 갤러리가 독자적으로 시카고 아트페어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20곳이 한꺼번에 ‘키아프(Kiaf)’라는 이름으로 동시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첫날 분위기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참여 갤러리들의 수고가 빛났다. 이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도 통할 만한 질 높은 작가와 작품군을 엄선해 시카고를 찾았고 함께한 36개국(93개 도시)의 주요 갤러리들과 견줘도 오히려 더 눈에 띈다는 호평을 얻어냈다. 높아진 환율 탓에 운송비 등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곳도 많았다. 샘터화랑은 박서보·이우환 등 한국 거장들의 작품을 47억 원 규모로 선보였고, 표갤러리는 ‘물방울 화가’ 김창열 작품만 20억 원 규모로 전시했다. 선화랑은 곽훈·이정지의 대형 추상 회화를 내걸어 눈길을 끌었고, 021갤러리의 경우 류재하의 대형 설치 구조물을 한쪽 벽면에 가득 채우며 아트페어의 ‘포토스팟’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히 갤러리박·금산갤러리·샘터화랑이 참여해 한국 단색화가 6명을 집중 조명한 대형 설치 섹션은 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며 K아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구매에 신중한 시카고 컬렉터들의 특성상 첫날부터 고가 작품 판매가 줄을 잇지는 않았지만 2만 달러 이하 합리적 가격대의 작품들은 빠르게 팔렸다. 써포먼트갤러리는 유미선·이인섭의 작품 5점을 수시간 만에 판매했고 그림손갤러리가 선보인 김병관의 작품도 금세 주인을 찾았다. 엑스포 시카고에 수년째 참여하고 있는 원앤제이갤러리는 윤향로의 디지털 판화 등 소품을 주로 선보였는데 부담 없는 가격과 크기 등으로 이날에만 수십만 달러어치가 판매됐다. 진지하게 계약을 논의 중인 곳도 많았다. 금산갤러리는 시카고의 핵심 미술관 한 곳과 ‘자개 작가’ 김은진의 작품을 전시·소장하는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서 한국 작가 작품이 미국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는 결과도 나왔다. 최대 후원사인 미국계 금융 기업 노던트러스트는 10년 이하 갤러리가 소개한 작가 중 몇 명을 선정해 주요 미술·박물관이 영구 소장하도록 작품을 구매·지원하는 상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올해 수혜를 받은 미술·박물관 3곳 중 한 곳이 한국 작가 신수를 선택했다. 이로써 신 작가의 작품 중 1만 달러 상당의 황동 조각 ‘우리, 민들레(리프트)’ 등 3점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이자 사립학교인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PAFA)’의 소장품이 됐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시카고 아트페어는 컬렉터와 미술관, 예술 전문가 및 관계자들이 이룬 커뮤니티의 수준이 높다”며 “꾸준히 참가해 아트신에서 인맥을 쌓고 한국 작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다면 개별 갤러리의 작품 판매를 넘어 한국 미술계와 작가에 대한 세계 컬렉터의 주목도가 크게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