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 속에 대내외 불확실성까지 덮치면서 한국 경제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산불과 정치 불안 탓에 경기 회복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벚꽃 특수’마저 사실상 사라졌다. 4월부터는 미국발(發) 상호관세도 본격화한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큰 피해를 예상하며 해외 주요 기관도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낮추고 있다.

30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미국은 4월 2일 당초 밝혔던 ‘상호관세’ 발표를 강행할 전망이다. 상호관세는 미국이 교역국으로부터 부과받는 관세나 비관세장벽에 상응해 매기는 관세다.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보고 있는 이른바 ‘더티 15(Dirty 15)’에 포함돼 있다. 상호관세는 철강ㆍ알루미늄ㆍ자동차 등 개별 품목 관세와는 별개의 조치다. 앞서 미국은 모든 수입 자동차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대(對)미국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의 관세율이 ‘25%+상호관세’가 될 가능성이 열렸다.
미국은 일단 모든 교역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되 나라별로 협상을 통해 완화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태도다. 당장 한국이 피해간다고 해도 문제는 간단치 않다. 미국의 상호관세는 거의 모든 나라를 타깃으로 한다. 각국이 미국을 상대로 보복 조치를 하거나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다른 나라 제품에 방어 조치를 시작하면 글로벌 통상 질서에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입장에선 2차, 3차 피해에도 대비해야 할 상황이란 뜻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미국이 관세 정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대체 수출처를 찾지 못한다면 한국 수출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수도 한국 경제의 아픈 손가락이다.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을 중심으로 급속히 번졌던 산불은 난고 끝에 불길은 잡았지만, 대규모 화마는 경제에도 깊은 내상을 남겼다. 이번 산불로 인한 피해 영향 구역은 서울 면적의 80%에 달하는 4만8238㏊로 역대 최대 규모다. 직접적인 피해도 크지만, 국가적 재난에 ‘봄나들이’ 분위기가 시들해지면서 내수 회복 타이밍 역시 뒤로 밀리게 됐다.

이미 재화 소비를 나타내는 소매판매액지수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감소했다. 특히 지난해엔 전년 대비 2.2% 줄어들며 카드 사태를 겪었던 2003년(-3.2%) 이후 2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수출 회복 국면에서도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 턱걸이에 그친 데는 건설 경기 둔화와 소비 부진이 치명적이었다.
반등을 기대했던 올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월부터 소매판매가 전월 대비 0.6% 감소했다. 서비스 소비를 가늠하는 지표인 서비스업 생산 역시 0.8% 줄었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 카드 매출은 소비 관련 대부분 업종에서 매출이 감소했다. 특히 숙박ㆍ음식점업은 12조700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2200억원가량(1.8%) 줄었다. 두 달 연속 상승했던 소비자심리지수(CCSI)도 3월엔 93.4로 2월(95.2)보다 1.8포인트 하락했다.
수출에 이어 내수까지 크게 흔들릴 조짐에 나라 밖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올해 한국 경제가 0%대 성장한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영국의 리서치회사 캐피털 이코노믹스(CE)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0%에서 0.9%로 하향 조정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지난 26일 올해 성장률을 1.2%로 기존(2.0%)보다 0.8%포인트 내렸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한국의 조정 폭이 가장 컸다.
대외 신인도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글로벌 채권정보업체 씨본즈에 따르면 지난 2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시장에서 5년물 한국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36.36bp(1bp=0.01%포인트)를 기록했다. 지난 1월 13일 40.42bp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달 27일 28.13bp까지 하락하며 안정됐던 CDS 프리미엄이 다시 반등한 것이다.
CDS 프리미엄은 채권을 발행한 국가의 신용 위험이 커질수록 상승한다. 최근 CDS 프리미엄이 다시 높아진 건 국내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한몫했다. 일본계 투자은행 노무라는 “헌재 심판이 미뤄지면서 2주간 국고채 금리가 시장 예상과 달리 반등(채권값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의 불안감이 커졌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미국 달러 대비 원화값은 29일 새벽 2시 기준 전날 야간 종가(1464.6원)보다 4.6원 내린(환율은 상승) 1469.9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8일 코스피 시장에선 외국인 홀로 6400억원어치 팔아치우면서 2600선이 무너졌다.
정부는 일단 1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잠깐의 경기 둔화가 아니라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좀처럼 구조적 반등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는 게 진짜 문제”라며 “당장은 2차 추경 등을 포함해 더 적극적인 수단을 써야 하는데 정치 이슈 때문에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염지현 기자, 세종=장원석∙김민중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