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청년 활동가 P에게

2025-04-14

P야, 내란의 밤부터 지난 파면 결정까지 이어진 광장에서 스태프가 되어 뛰어다니는 너를 보았다. 폭설이 내리고, 살을 에는 북풍이 몰아치는 남태령과 한남동에서 밤을 지새우는 너를 SNS를 통해 보았다. 그 밤을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그때 밤을 같이 지새우지 못한 미안함보다 더 큰 미안함이 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28세의 청년 활동가인 너는 내게 물었다. 열일곱살에는 세월호 참사, 스물두살에는 이태원 참사를 겪은 1997년생인 너. “우리 97년생은 저주받았어요. 세상은 바뀔까요?”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니? 인권운동 오래 한 것밖에 내세울 게 없는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뀌겠지, 아마 변할 거야.”

이번엔 탄핵에 안주하지 말자

P야, 너에게는 세월호도, 이태원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많이 울었고, 사건 해결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동료들과 대화의 장도 만들고, 추모 행사에도 친구들을 모아서 함께 참여했다. 그런 네가 이제는 청년 활동가가 되어서 광장의 스태프가 됐지. 동료들과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응원봉을 들고 신나게 춤추던 네 눈빛은 불빛보다 더 찬란했다. 그런 힘이 있었으니까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광장을 지켜냈던 거겠지. 그런 연대의 힘이 있어서 내란 우두머리를 파면시킬 수 있었다. 고맙다.

나는 죽음을 외면하고, 모멸하는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두 번의 탄핵이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2년 전, 이태원 참사 때의 모습을 생각한다. 피해자들이 모이지도 못하게 막았고, 강제 국가애도기간을 설정하고, 근조 리본도 달지 못하게 했던 그자는 그 2년 뒤에 탄핵광장을 보게 됐다. 8년 전에도 탄핵광장이 열렸지.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당했지만, 그 2년 전에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모독하고, 아픔을 주었던 박근혜였다. 이제 이 나라에는 10년 주기설이 아니라 ‘8-2-8-2 주기설’이 새로 탄생한 것인지도 모르지.

너도 잘 알다시피 두 권력자는 참사 희생자들을 무시했다. 두 참사의 피해자들뿐 아니라 세상에서 억울한 일 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잔인하게 외면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피해자들을,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을 종북좌파로 몰아갔다. 소중한 가치들은 무너져 내렸고, 그와 함께 나라 꼴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 때 “이게 나라냐!”고 적힌 팻말을 들었고, 이태원 참사 때도 같은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왔지. 두 권력자는 세월호, 이태원의 저주를 받은 거야. 이번 기회에 사람의 생명 갖고 장난치는 자는 그 누구라도 벌을 면치 못한다는 게 상식으로 자리 잡히면 좋겠다.

내란 너머 평등과 안전의 땅으로

P야, 나는 너에게 세월호 참사 11주기를 코앞에 두고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돌아보면, 8년 전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빛의 혁명’이라는 말도 좋지만, 그 칭송 뒤에 숨겨진 교활함을 보기를, 그런 말로 너희를 칭송하는 자들은 너희를 이용할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세대는 청년 시기에 민중을 위해 헌신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헌신, 너무 좋은 말이었지만,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시대로 넘어올 때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에 누구보다 기민했다. 그런 기민함으로 자본의 질서 속에 안착하고, 기득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박근혜들’ ‘윤석열들’과 같은 괴물들이 탄생한 데는 철저하지 못한 운동의 결과들이 만들어낸 허약한 민주공화국 탓일 것이다. 경쟁과 효율, 독자생존의 질서를 생명과 안전의 가치보다, 평등의 가치보다 앞세운 탓이지 않을까? 매일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는 체제, 죽어라 일해도 가난해져만 가는 세상. 모든 부와 권력은 소수 엘리트에게만 집중되는 세상은 지옥이었다.

P야, 당장은 내란의 잔불을 꺼야 하는 과제가 시급하다만, 내란 너머, 우리가 만날 세상에는 과거의 깃발이 아니라 지금의 깃발, 미래의 깃발을 세우자. 그 깃발에는 온 존재들이 차별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의 꿈, 안전하게 생명을 꽃피우는 그 꿈을 그려 넣자. 그 꿈은 오늘도 살고 싶었을 친구들의 꿈이었을지도 모르니, 이번 광장에서 연대로 빛났던 그 꿈을 포기하지 말자.

P야, 덕분에 꽃피는 봄에 다시 만날 세상을 꿈꿀 수 있어 고맙다. 참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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