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농업이 고령화와 기후위기, 국제 통상 불안정까지 겹치며 생존의 기로에 섰다. 위기를 진단한 전문가들은 대선을 계기로 농업·농촌·농민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농업 생산성 향상과 세대 교체, 정책 추진체계의 혁신까지… 복합위기 시대,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담보할 대선 의제를 짚어본다.
◆복합위기 당면한 한국 농업=전문가 10명 중 7명은 ‘고령화’를 가장 심각한 농업위기 요인으로 지목했다. 오미란 젠더&공동체 대표는 “농가인구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농 비율이 55.8%에 달한다”며 “소농이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농업구조에서는 농업의 지속가능성이 빠르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기후위기 역시 위험 요소다. 임정빈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기후변화로 인한 극심한 농업재해가 생산량과 품질 저하로 이어지면서 식량자급률 하락, 농촌경제 침체 등 사회 전체에 막대한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으로 가변성이 높아진 통상 환경도 변수다. 이준원 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트럼프 시대에 수입 농산물의 관세·비관세 장벽이 쟁점이 될 수 있다”며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자유무역협정(FTA) 가입, 기존 FTA 개선 압력이 고조될 수도 있다”고 했다.
◆“공동·영농 법인 활성화로 농업 규모화해야”=차기 정부가 우선 추진해야 할 농업과제로는 ‘규모화를 통한 생산성 개선’이 지목됐다. 강용 학사농장 대표는 “공동농업 등 합리적 규모화와 함께, 농업법인을 활용해 고령농 위탁경영과 영세농 중심의 협업농을 활용·육성하는 정교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농업소득을 완충할 대책 마련도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이춘수 국립순천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쌀값과 농가소득 안정을 위해 시장격리 중심의 대증 처방은 폐지하고, 쌀소득보전직불제와 같은 실질적 소득안정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며 “농업수입안정보험은 중장기적인 대책일 뿐, 단기적 대응책으로는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장민기 농정연구센터 소장은 “기본형 직불제나 품목별 수입안정보험 중심의 기존 소득안전망을 경영체 단위의 실질적 보장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농업재해보험과 수입안정보험은 농자재 가격 상승 등 비용 불안에 따른 소득 변동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실제 수입을 입증할 수 있는 농업경영체를 대상으로, 납세 정보에 기반한 소득 보장형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직불제를 농정 목표 달성의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전 차관은 “직불금을 6조원까지 확대하되 스마트팜, 친환경농가 등 정책 목표에 부합하는 대상에 집중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민이 주도하는 농촌 정책 필요=행정기관 중심의 농정 구조를 주민 주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도 힘을 얻는다. 구자인 마을연구소 일소공도협동조합 소장은 “읍·면 단위에서 주민 주권을 보장하고, 공동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며 “특히 정책 전문성을 약화시키는 중앙·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의 순환보직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향식 농정을 뒷받침할 교육시스템 개편도 거론됐다. 구 소장은 “1박2일 워크숍 중심의 집중 교육으로 민관 공론장을 활성화하고, 민간 활동가를 육성할 수 있도록 통합형 중간지원조직 설치와 상근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농촌 정주 여건 개선 역시 빠질 수 없는 핵심 과제다. 오 대표는 “(물리적) 공간 정비뿐 아니라 육아·교육 등 기초 사회서비스 체계 강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며 “농촌 사회의 통합과 마을 민주주의, 성평등 등 인권 의식 향상도 중요한 과제”라고 짚었다. 이 교수는 “개발 중심의 접근은 지양하고, 치유농업과 사회적농업을 기반으로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매력적인 농촌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령농에겐 퇴직연금을, 미래세대는 전문직 육성=세대 전환과 인력 재편도 간과할 수 없는 과제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면 고령농의 은퇴 연착륙과 미래세대의 전문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이 뒤따랐다. 이 전 차관은 “65세 이상 농민에게 자산과 관계없이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지역농협이 노인요양 등 복지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을 ‘전문직’으로 육성하는 전략도 언급됐다. 강 대표는 “영농 자원 확보와 농업 교육 이수 등을 자격 요건으로 농민을 전문직으로 육성해야 한다”며 “재해보험 확대와 퇴직연금 도입을 통해 농민이 현재와 미래의 소득에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청년농의 실습 공간 확대 필요성도 제기됐다. 류진호 한국4-H청년농업인연합회장은 “스마트팜, 탄소중립 농업 등 최신 농업기술을 실험할 수 있는 거점 농장을 운영하고, 청년농이 직접 실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촌 고령화에 따른 정서적 위기를 주목하는 시선도 있었다. 오 대표는 “고립과 우울감 속에 농민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어, 정서적 지원을 강화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농정 의제 핵심으로 떠오르는 ‘거버넌스 강화’=농업계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 속에, 민관 협치를 의미하는 ‘거버넌스’ 강화가 대안으로 꾸준히 강조된다.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려면 ‘예산 개편’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은 “핵심 농정사업은 5년 단위 예산제를 도입해 정책의 예측가능성과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임 교수는 “(국가 전체예산 대비) 농식품부 예산 비중을 현행 2.8%에서 5%까지 확대하고 기후변화, 자연재해, 가격 변동과 관련한 정책은 1년 단위 예산이 아닌 법정의무 지출 방식으로 전환해 안정적 재정 집행을 담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역과 현장 중심의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구 소장은 “‘공유 재산 관리위탁’과 ‘행정사무 민간위탁’이 활성화돼야 부처 칸막이를 넘어 민관이 함께 정책을 설계·운영하는 거버넌스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 등으로 지역에 공공시설은 늘었지만, 이를 운영할 주체가 취약한 현실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구 소장은 “보조금과 수당 중심의 제도는 민간을 행정에 종속시킬 우려가 있다”며 “보조금사업의 예산 과목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농민단체의 정책 역량 강화는 성숙한 거버넌스의 필요조건으로 제시됐다. 김태연 단국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농민단체가 정책의 공공성과 타당성을 뒷받침하려면 전문 연구자와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며 “직접 고용하거나 외부 연구자와 파트너십을 통해 정책 지원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정책 결정 구조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빠지지 않았다. 이 교수는 “대통령실 농해수비서관을 수석비서관급으로 격상하고, ‘저출생대응수석’을 ‘농어업·지역소멸대응수석’으로 개편해 농어업을 국가 존립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소진 기자 sjkim@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