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웨어 엘리트’ 대 ‘섬웨어 대중’

2025-12-07

처음부터 그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때 경제 커뮤니티에서 ‘창드래곤’으로 불리며 추앙받던 인물이다. 국내외 경제 상황에 대한 이 총재의 브리핑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열광적으로 공유되곤 했었다.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발언들은 답답한 관료적 설명들과 대조를 이루며 화제가 됐다.

한은 총재와 서학 개미들의 갈등

고환율 요인으로 해외투자 지목

정책엘리트와 대중의 괴리감 커

규제보다 존중이 공존의 디딤돌

좋았던 관계가 이상 기류에 접어든 것은 금년 봄 이 총재의 대학입시 제도 발언 이후였다. 그러던 중 지난달 이 총재가 환율 불안의 요인으로 청년 서학 개미를 지목하면서 추앙은 격렬한 비판으로 바뀌었다. 최근 역대급 수출 실적에도 불구하고 원 달러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하는 불안한 모습이 지속되자 이런저런 진단과 해법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즈음에 이 총재가 고환율 현상의 배경으로 젊은 층의 해외투자 쏠림 현상을 거론하면서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정부의 느슨한 재정 운영, 수출 기업들의 해외 투자 등은 제쳐두고 해외 주식 투자자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는 비판이 온라인을 뒤덮게 되었다.

원화 약세에 작용하는 수많은 대내외 변수들과 직간접 요인들을 따지는 것은 경제 전문가들의 몫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창용 총재와 서학 개미의 충돌이 우리 사회의 중요 갈등, 즉 ‘애니웨어(anywhere) 엘리트’와 ‘섬웨어(somewhere) 대중’의 갈등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화려한 경력, 인맥, 전문성을 바탕으로 서울대, 하버드대, IMF(국제통화기금)를 누비다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한 이 총재는 전형적인 ‘애니웨어 엘리트’이다. 뛰어난 전문성과 네트워크로 지구촌 어디서나 자유로이 둥지를 틀 수 있는(anywhere) 글로벌 엘리트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서학 개미들은 전형적인 ‘섬웨어 대중’이다. 해외 유학, 해외 취업을 꿈꾸기 어려운 평범한 가정 출신들이 국내에서 모은 돈으로 자립의 꿈을 담아 미국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서학 개미 현상이다. 달리 말해, 똑똑하지만 현실에는 둔감한 엘리트와 어떻게든 현실에서 생존하려는 평범한 이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대한 절벽이 있다(데이빗 굿하트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필자가 보기에 청년들이 미국 주식 시장으로 몰려가는 데에는 몇 가지 중대한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노동의 위기와 벌어지는 노동-자산의 격차. 둘째, 미래 한국에 대한 희망의 빈곤. 셋째, 미국 자본시장의 합리성과 혁신 경제에 대한 동경.

첫째, 노동의 위기와 자산 격차의 문제. 토마 피케티를 필두로 해서 숱한 학자들이 자본 수익률(r)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률(g)을 압도한다는(r>g) 연구 결과를 발표해 왔지만 요즘 청년들에게 이는 이론이 아닌 현실이다. 적절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월급으로 대표 자산인 아파트값을 따라가기는 지극히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스무살 학부생들도 취업 공부, 학교 공부하는 틈틈이 미국 주식투자에 매달린다. 결국 아르바이트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사들이는 엔비디아 주식 몇 주에는 금융 자본주의에서 생존하려는 청년들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둘째, 서학개미 청년들이 미국 주식을 통해 달러 자산을 조금씩이나마 모아보려는 데에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비관이 담겨 있다. 성장률은 1퍼센트 대로 주저앉았는데 인구 구조는 급속히 초고령화하고 있다. 갈수록 경제활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줄어들고 사회가 부양해야 하는 노인은 늘어나는 미래는 확정적이다. 애니웨어 엘리트와 그 자녀들은 유학이나 이민을 갈 수 있지만, 섬웨어 청년들에게는 마땅한 탈출구가 없다. 이들이 어두운 한국의 미래를 헷지(위험 회피)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미국 주식, 즉 달러 자산을 늘려가는 것이다.

셋째, 청년들은 젊은 사람답게 새로운 변화와 혁신에 더 민감하고 열광한다. 청년 서학개미들이 미국의 테슬라(자율주행, 우주개발), 양자 컴퓨팅 기업들, 생명공학 기업들, 금융혁신 기업들에 몰두하는 이유는 한편으론 현란한 주가 변동성에 몰입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혁신에 동참해보려는 욕구의 발현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청년 서학 개미들에게 우려스러운 바가 없지는 않다. 투자보다 투기에 가까운 행태, 과도한 쏠림, 리스크에 대한 통제의 부족 등등. 하지만 현상의 본질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한국 사회에 갇혀 있는 청년 섬웨어들의 생존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미국 주식 투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몸은 한국에 매여 있지만, 미래를 향한 실마리를 선진 자본시장에서 찾아보려는 합리적 선택이기도 하다.

필자는 애니웨어 엘리트가 자세를 낮추고 경청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청년들이 하는 선택을 조용히 지켜보라. 동정하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말라. 규제하거나 조언하려 하지 말라. 그저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라.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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