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60〉과기자문회의, 과학기술진흥 정책 건의

2025-04-29

1992년 4월 3일 청와대 경내는 파릇파릇한 초록빛으로 싱그러움을 자랑했다. 하늘은 티없이 맑고 볼을 스치는 바람은 솔털처럼 부드러웠다. 봄의 전령인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 집현실에서 1992년 첫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고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정책 건의 사항'을 보고 받았다. 범정부 차원에서 과학기술계 현안을 종합해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자리였다.

이 회의에는 김성진 위원장을 비롯해 조순 전 경제부총리,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전무식 교수 등 자문의원과 김진현(과학기술처)·조완규(교육부)·권이혁(환경부) 등 유관 부처 장관 및 청와대·자문회의 관계자 등 19명이 참석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집현실로 입장해 자문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정책 건의 사항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날 보고 안건은 크게 △과학기술 기초연구 진흥과 과학기술인 인력양성 방안 △환경과학기술 종합대책 △새로운 자문과제 주문 등이었다.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은 '국제과학기술정책 동향'에 대한 특별보고를 했다.

김성진 위원장은 이날 보고에서 관련 부처 예산에 기초연구비 항목을 신설하고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와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환경기술개발원(현 한국환경연구원) 설립 등을 건의했다.

김성진 위원장은 “기초과학연구를 획기적으로 진흥하기 위해 관련 부처 예산에 기초연구비 항목을 별도로 신설하고 부처와 정부투자기관의 연구투자 가운데 일정 비율 이상을 기초연구비로 책정해야 합니다”라면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과학기술 개발로 대처하기 위해 환경기술개발원(가칭)을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설립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김성진 위원장은 “21세기는 기후변화와 환경산업이 큰 문제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처별로 추진하는 환경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이를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고 각 연구기관 간 연구 능력을 조직화할 수 있는 환경기술개발원을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환경 관련 정책과 기술 연구개발 및 환경 영향 평가의 전문성·공정성 제고를 위한 일입니다. 이와 함께 환경오염 방지 기금 확대와 저공해 농약·세제 및 전기자동차 등 청정기술 제품, 청정에너지와 염화불화탄소(CFC) 대체물질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김성진 위원장은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공계 박사과정 병역 미필자에 대한 병역의무 면제 또는 유예 등 혜택을 확대하고, 대학 연구 활성화를 위해 낙후 연구시설을 확충하며, 대학교수 정원과 연구비 지급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이공계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과 박사 후 연구과정 확대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어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이 '국제과학기술정책 동향'에 대해 특별보고를 했다.

김진현 장관은 특별보고에서 “국내 정보기관이 해외 과학기술 정보도 수집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나같이 미래를 내다본 정책 건의였다.

김진현 장관은 “국내 정보기관들이 고유 기능 수행과 더불어 과학기술 정보 수집도 해야 한다”면서 “데탕트 이후 선진국들은 군축의 여력을 민수와 겸용기술 개발에 쏟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들도 고유 기능 수행과 함께 해외 과학기술 정보도 수집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선진국의 기술패권주의와 기술장벽에 대응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김진현 장관은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은 기술과 경제 정보 수집에 주력하고 있으며 중앙정보국(CIA)도 과학기술정보수집센터 설립을 추진하는 등 세계 선진 정보기관이 과학기술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서 “선진국에서는 기술 정보를 생산 활동의 핵심 요소로 파악해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정보 체제를 이미 구축, 국내외 정보 수집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과학기술 정보 보급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김진현 장관은 “일본의 경우 지난 57년부터 과학기술청 산하에 과학기술정보센터, 미국은 상무부에 국립기술정보서비스국, 프랑스는 연구개발부에 과학기술정보 연구소를 각각 두고 있다”면서 “대만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과학기술정보센터를 두고 전문기관·도서관 등과 연계해 기술정보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각 연구소·대학 등이 필요로 하는 외국간행물 목록을 받아서 일괄 구매·배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진현 장관은 “우리도 고유 독자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중점을 두고 육성할 전략 분야를 선정해 국가 주도의 종합정책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기술정보 수집 제공을 위한 특별대책을 수립해서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기초연구 진흥과 과학기술 인력 양성 방안 및 과학교양과목 확대는 교육부에서 추진하고 환경과학기술종합 대책은 환경부 장관 등 관계부처 장관이 적극 협의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과학기술 교육제도의 발전적 개선 방안과 국가 연구 활동의 생산성 제고 방안에 대해 자문회의가 각계의 지혜를 모아 좋은 건의안을 마련해 달라”면서 “기술 자립과 독창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더욱 분발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어 자문위원들과 현안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

▲노태우 대통령=(전무식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에게)기초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공계 대학 교수를 증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자질을 갖춘 교수 인력은 충분합니까?

▲전무식 교수=해외에 교포과학자들이 많아 확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노 대통령=(김영식 서울대 교수에게)과학기술 진흥 풍토 조성을 위해서는 교양과학 교육을 확충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대학의 교양과정 가운데 과학교육 실태는 어떻습니까?

▲김영식 교수=과학교양 과목은 1과목을 선택도록 해서 2~3학점을 주는 전문 과학지식을 강의하고 있어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역사·철학은 이해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심정섭 학술원 회원에게)환경기술개발원을 정부출연기관으로 설립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기존의 연구기관을 활용해서 연구비를 지원하는 방안도 있을 텐데요.

▲심정섭 학술원 회원=현재 국제환경관계 협약이 150개 정도고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며, 21세기는 환경산업이 주도할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기관을 설립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조완규 교육부 장관에게) 기초연구 진흥, 인력 양성은 대학의 활성화와 직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교육부에서 주관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조완규 장관=현재 과학기술처 산하 과학재단을 통해 기초과학 연구비를 각 교수에게 지원하고 있는데 이를 더 확충해서 현행처럼 지원하고, 인력 양성은 교육부가 전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 대통령=과기처와 잘 협의해서 추진해 주기를 바랍니다.

▲박규태 연세대 공대 학장=제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공대에 985억원을 지원토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들의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 대통령 =(권이혁 환경처 장관에게)오늘 보고 외에 환경처가 역점을 두고 추진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권이혁 장관= 재단법인으로 환경기술개발연구원 설립을 추진하는 일입니다.

▲노 대통령=서울대 공대에서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한데 어울려 연구하느라고 밤 늦게까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흐뭇했습니다. 젊고 유능한 과학자를 많이 배출한다면 국가 앞날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과기자문회의 보고 후 환경처는 환경기술개발원 출범을 서둘렀다.

1992년 12월 6일 환경개발원 추진위원회를 열고 개발원 사업계획과 정관 마련, 임원 선임 등을 논의했다. 초대 원장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노재식 박사를 내정했다. 노 원장은 서울대 물리학과와 영국런던대 대학원을 나온 이학박사로, 한국원자력연구소 보건연구실장과 한국기상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3년 1월 29일 오전 10시 한국환경기술개발원은 이재창 환경처 장관과 노재식 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개발원에서 현판식을 갖고 정식 업무를 시작했다. 국내 유일의 환경 분야 국책연구기관의 출범이었다.

1997년 9월 개발원 명칭을 한국환경정책연구원으로 개칭했고, 1999년 1월 국무총리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전환한 뒤 2021년 8월 한국환경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 원장은 이창훈 박사다. 이창훈 원장은 연구원에서 기획조정실장, 정책연구본부장,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현덕 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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