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10개? 국립대 개혁이 먼저다

2025-05-20

생각은 달라도 열의, 끈기만큼은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대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1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공개한 10대 공약을 읽다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마주쳤을 때 기자가 그랬다. “수도권 중심의 대학 서열화 완화”를 위해 지역거점국립대로 불리는 강원·경북·경상·부산·전남·전북·제주·충남·충북대에 집중 투자해서 서울대 수준으로 키우자는 공약인데, 이건 당이 만든 게 아니다. ‘학벌 타파’에 공감하는 학자, 교육감, 교육 운동가들이 무려 20여년 간 논의해온 ‘국립대통합네트워크’ 구상의 최신판으로, 지난 총선에 이어 이번 대선에도 민주당이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15일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발표한 ‘서울대와 지역 거점대학 간 공동학위제 활성화’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국립대통합 구상에서 먼저 나왔던 아이디어로, 대선을 앞두고 서울대 교수회 등이 정치권에 제안했다.

진보학계의 20년 공들인 구상

민주당 공약 채택…소요 예산 3조

“국립대 체질개선 없인 성공 못해”

2010년대 초 교육 담당 시절 시민단체 토론회, 교육감 간담회에서 종종 듣긴 했지만, 여야 모두 공약으로 채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곤 예상 못 했다. 돌아보면 국립대통합 구상은 일종의 사회운동이자 집단 창작물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폐기된 서울대 폐교론에서 영감을 받아 2000년대 초 등장한 이후 일군의 학자, 진보 교육감, 교육 관련 단체들이 아이디어를 보태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다듬었다.

민주당이 채택한 ‘서울대 10개…’는 지금껏 나온 안 중 가장 ‘순한 맛’이다. 거부감을 줄이고 설득력은 높이려 시도했단 뜻이다. 제안자인 김종영 경희대 교수가 2021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 등에 따르면, 기존 구상과 달리 서울대 학부 폐지, 서울대와의 공동선발·공동학위제 등은 가능성을 열어는 두되 당장 시행하진 않는다. 서울대 반발, 하향 평준화란 비판을 최소화하려는 차원이다. 대신 UC 버클리·UCLA 등 유수의 공립대 10곳으로 구성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체제(UC 시스템)를 모델로 삼아 국립대의 동반 성장, 상향 평준화가 목표라고 제시했다. 특히 지역소멸과 입시 지옥을 동시에 벗어나는 ‘신의 한 수’임을 강조한다.

물론 공들여 오래 숙성했다고 반드시 품질이 좋은 건 아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실현가능성에 의문이 이어진다. 지지자들은 ‘대학 간 격차=투자(교육비) 차이’란 단순 논리를 펴면서 9개 대학에 ‘서울대 수준’으로 돈을 풀면 연구·교육 질이 세계적 수준으로 상승하리라 장담한다. 신설 당시 과감한 투자가 디딤돌이 된 KAIST, 포스텍,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IGST)의 고속 성장이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투자=성장’이란 공식이 그렇게 쉽게 작동할까. 무엇보다 KAIST 등은 신생 대학의 이점이 있었다. 공백 상태에서 유능하고 의욕 넘치는 교수를 대거 유치해 (적어도 초기엔) 기성 대학과 확 다른 진취적인 학풍을 창출했다. 반면 지역거점으로 불리는 9개 대학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교수 연구 업적이 양·질 모두 여느 수도권 사립대에 한참 뒤진다. 대학들은 수도권 집중화, 정부 지원 부족을 침체 원인의 전부인 양 말하나, 수십년간 변화에 둔감한 채 ‘주인 없는 대학’, ‘개혁의 무풍지대’로 남아 연구실적 기준 강화, 학생 강의 개선 등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다. 지역 기여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지역 특성, 특성화 등을 고려하지 않고 ‘전부 다 있지만 깊이는 없는’ 백화점식 학과 운영을 답습하고 있다. 벤치마킹 대상이라는 UC 시스템과 딴판이란 얘기다. 이대로라면 김종영 교수가 저서에서 지적했듯 ‘왜 수조원의 국민 세금을 우수하지 못한 대학을 위해 써야 하는가’란 문제 제기를 피하기 어렵다.

재원도 문제다. 지난 총선 당시 민주당은 2조7000억원, 20일 국회 토론회에 모인 국립대 총장들은 3조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딱히 재원 확보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대규모 예산 증액 없이 그저 기존 대학 지원 예산을 나눠 써야 한다면 사립대 100여 곳, ‘거점’에 속하지 못한 국립대(지역중심국립대) 27곳에 대한 정부 지원은 확 줄 게 뻔하다. 학생 감소와 등록금 동결 기조에 재정이 악화된 사립대 사이에선 벌써 “게으른 대학(국립대)을 승자로 정하고 시작하는 부당한 구조조정”이란 불만이 나온다.

나날이 침체, 아니 퇴보하는 국내 대학들에 과감한 투자가 절실한 건 맞다. 하지만 투자엔 혁신의 불씨를 살리고 키우려는 체질 개선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지역거점국립대들이 진정 새로운 대학 생태계의 주역이 되고 싶다면 당장 자기 개혁부터 선언하고 뼈를 깎는 각오로 실천에 나서야 한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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