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인프라가 강한 나라가 선진국

2024-11-24

최근 동남아시아의 한 수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주최 측이 예약한 특급호텔에 묵으면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결정적 차이를 목격했다. 호텔 안은 우리나라나 다른 선진국의 호텔과 다름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호텔 경계를 한 발짝 벗어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호텔 안에서는 깨끗한 생수가 있었지만, 밖에서는 배앓이를 걱정해야 했다. 호텔 앞 도로는 정체로 늘 마비 상태였고, 인도는 땜질 공사로 곳곳이 패여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텔 정문 하나를 경계로 이토록 다른 두 세상이 공존했다. 불과 한 걸음 차이로 극명하게 갈리는 두 세상을 보며 선진국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호텔만 완벽한 후진국 도시

인프라 부실할 때 양극화 심화

선택의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미래 위해 인프라에 투자해야

선진국은 좋은 호텔이 있는 곳이 아니다. 후진국에도 얼마든지 좋은 호텔은 있다. 선진국은 호텔 밖의 공공인프라가 호텔 안 만큼 잘 갖추어진 곳이다. 도로와 전력·상하수도·통신망과 같은 기초 인프라부터 교육·의료·치안과 같은 사회 인프라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한 마디로 공공이 강한 국가가 선진국이다.

포용적 제도와 약탈적 제도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아세모글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바로 ‘포용적 제도’의 핵심이다. 아세모글루는 모든 시민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그 혜택을 고루 나눌 수 있는 체제를 포용적 제도라 했다. 반대로 소수 특권층이나 독점기업만이 혜택을 누리는 체제를 약탈적 제도라 불렀다.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여러 국가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약탈적 제도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포용적 제도로 성장한 대표적 사례로, 남미를 약탈적 제도의 전형으로 제시했다. 포용적 제도가 있는 곳은 단적으로 공공인프라가 강하다. 공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모든 아이가 자기만의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갖고, 도로와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출퇴근에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치안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 경비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특권층이 아니라도 평균적으로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남미 국가들에 투자를 꺼리는 것도 치안과 물류 인프라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임금 노동력을 내세워도 공공인프라가 부실하면 소용이 없다. 삼성전자가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중국 정부는 5.6㎞의 ‘삼성로’를 건설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도 2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삼성 하이웨이’를 만들었다. 멀리 볼 것 없이 용인 반도체 단지 계획이 수년째 난항을 겪은 것도 전력과 용수 공급 문제 때문이었다. 공공인프라는 기업이 뛸 수 있는 운동장과 같다. 움푹 패고 물이 고인 흙 땅에서는 제아무리 메시라도 공을 제대로 찰 수 없다. 기업 활동이 활발해서 인프라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프라가 좋아야 기업이 모여든다.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다. 스탠퍼드 대학과 국방부의 선제적인 공적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공공이 강한 곳에 기업이 몰려든다.

공공이 약하면, 즉 공공인프라가 부실하면 결정적으로 양극화가 심화한다. 1991년 로버트 라이시가 경고했던 ‘부자들의 이탈’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부자들은 공공인프라 투자에 소극적이다. 대신 자신들만의 해결책을 찾는다. 공공버스보다는 고급 승용차를, 국가 전력망보다는 개인 발전기를,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를 선택한다. 영화 ‘엘리시움’(2013)은 이런 현상을 극단적으로 그렸다. 부자들은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우주정거장으로 떠나고, 빈자들은 황폐해진 지구에 남는다. 많은 국가에서 영화 속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기술혁신 정책의 핵심, 공공문제

미국과 유럽이 추진하는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 정책의 핵심도 공공문제다. 기후변화·감염병·에너지 같은 국가 혹은 인류 차원의 공공문제, 즉 퍼블릭 미션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기업에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이런 공공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함이다. 대학이나 연구소에 지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간 부문에 연구개발 자금이 부족하니 이를 메워주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이 공공의 문제 해결에 쓰여야 한다는 공적 방향성이 핵심이다.

글로벌 기업들도 공공성을 지향한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에너지기업은 기후 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고, 위성 인터넷기업은 아프리카 오지의 정보격차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업이 내놓는 제품과 서비스가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더 높이는 데 기여하는 지, 혹은 훼손하는 데 한몫하는 지가 훌륭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한국은 지난 고도성장기 동안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했다. 성장의 밀물이 큰 배와 작은 배 가릴 것 없이 모든 배를 들어 올렸다. 공적 마인드가 강했고, 공공인프라도 우수한 것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철도와 고속도로·광대역통신망·전력망의 수준이 높았고, 교육·의료·행정 등 공적 부문의 수준도 그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높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공성이 낮아지고, 그 결과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있다.

이제 우리도 선택해야 한다. 부자들의 이탈을 방치하고 후진국으로 가는 길, 아니면 공공성을 강화해 모두가 함께 가는 길. 선진국의 문턱에서 우리는 이 갈림길에 서 있다. 답은 명확하다. 공공이 강한 국가가 선진국의 기본조건이다. 공공인프라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국가적 과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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