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오래된 미디어라면 책은 중요한 메모리 칩이고 도서관은 절대적인 지식 전승과 생산의 장소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열리고 어디서나 지식 접근이 가능한 유비쿼터스 세계가 되면서 도서관의 전통적인 정체성은 도전을 받고 있다.
시애틀은 2004년 개관한 중앙도서관이 “종이책을 기념하며 모든 미디어를 담는” 공간이 되기를 원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렘 콜하스(80)는 그 설계를 강력하게 자원했다. 20세기 후반의 해체주의적 흐름을 주도한 이론적 건축가답게 그는 도서관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해석해 매우 독특한 공간과 형태를 창조했다.
우선 도서관의 기능을 재분류해 주차장·지원시설·강당·서고·관리실 등 5개 플랫폼을 완벽히 기능적으로 설계했다. 이들 사이에 아동 공간, 시민 라운지, 정보 소통홀, 독서실 등 4개의 중간 영역을 삽입했다. 규격적인 플랫폼들과 자유로운 중간 영역들을 수직으로 층층이 쌓아 결과적으로 틀어지고 튀어나온 독특한 건물이 되었다. 기능과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그에 맞도록 공간을 구성한 후, 마치 물품 보관용 그물을 씌우듯 유리 격자의 외피를 입혔다. 규격적인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기능들을 끼워 넣는 일반 설계 방법과 정반대의 과정이었다.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4개 층의 이중나선 구조 서고다. 기존의 듀이 십진법 분류는 장르 간 불균형과 단절을 초래하는 고정된 공간을 전제로 한다. 날로 새 장르가 생기고 장서량이 급증하는 현대에 이미 낡은 틀이다. 중앙도서관의 핵심부에 자리한 대형 서고는 2%의 완만한 나선형 경사로에 서가들을 배열해 유연한 분류와 연속적인 장서가 가능해졌다.
시민들의 공공시설답게 4개의 중간 영역을 24시간 개방한다. 밤잠 없는 아이들의 야간 놀이터가 되기도,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의 의자 잠터가 되기도 한다. 격자형 근대건물로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 ‘그물 망사를 입고 춤추는’ 중앙도서관은 IT도시 시애틀의 유쾌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