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와이너리] 화장품 회사가 만든 '노크 만년필'의 새로운 문법

2024-11-25

[비즈한국] 기업이 한 분야에 필요한 기술을 축적한 후, 비슷한 기술을 요구하는 분야에 함께 진출하는 경우가 있다. 악기에서 시작하여 탈것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지평을 넓혀온 일본 야마하가 대표적이다. 야마하 정도의 규모는 아니어도, 최근 선보인 라이텍(Writech) 노크 만년필 역시 코스메틱 브랜드가 만든 만년필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방향은 비슷하다.

페어그린의 코스메틱 브랜드인 클리카는 원터치로 사용 가능한 화장품 케이스를 개발하고 이를 응용한 아이라이너, 아이브로우, 메이크업 브러시 등의 제품을 제조·판매한다. 이 케이스의 특징은 캡과 연결된 버튼을 조작하여 한 손으로 헤드를 꺼낸 후 다시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이 끝나면 캡 부분은 밀폐되어 내용물이 마르거나 새는 것을 막아준다. 뚜껑이 일체형이라 분실할 위험도 없다.

그런데 화장품과 무관하면서도 유사한 작동 방식을 지닌 제품이 있다. 일본 파이로트가 캡리스(Capless)라는 이름으로 처음 내놓은 노크식 만년필이 그것이다. 기존 만년필은 크건 작건 펜촉을 보호하는 분리형 캡을 갖고 있다. 이 캡은 기능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두 손으로 열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캡리스는 노크 기구와 연동된 밀폐형 셔터를 내장함으로써 만년필을 볼펜처럼 간편하게 쓸 수 있게 만든 ‘노크식 만년필’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클리카 원터치 오토캡 케이스의 내부 기구를 펜촉과 피드, 잉크 카트리지로 바꾸면 그대로 노크식 만년필이 된다. 쓰기(Write)와 기술(Tech)이 결합한 듯한 작명에서 밀폐 케이스 기술을 강조한 이 틈새 라인업의 성격이 읽힌다.

라이텍 노크 만년필은 필기구 전문 기업의 각축장인 만년필 시장에 나타난 신선한 시도지만, 개선해야 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크와 함께 앞으로 밀려 나오는 셔터는 필기 시 걸리적거릴 수 있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파이로트 캡리스, 플래티넘 큐리다스 등 노크식 만년필 시장을 주도하는 제품들은 대부분 셔터가 배럴 안쪽에서 개폐되어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화장품은 사용 시 도구 자체보다 얼굴을 보기 때문에 셔터가 어느 쪽으로 열리든 크게 상관이 없겠지만, 만년필은 사용 시 펜 끝을 주로 보게 되므로 밖으로 돌출되는 셔터는 디자인상 확실한 마이너스 요소다.

만년필 관련 노하우의 부족은 클립 위치에서도 드러난다. 일반적인 노크식 만년필은 클립이 손이 직접 닿는 그립 부분에 있다. 잡기 불편한데도 그렇게 만든 이유는 클립을 어딘가에 꽂으면, 만에 하나 잉크가 새는 일이 없도록 펜촉이 위쪽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세워서 보관할 때 펜촉 끝을 위로 두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라이텍 노크 만년필의 클립은 마치 볼펜이나 샤프펜슬처럼 그립 반대편에 있어, 클립을 꽂으면 펜촉이 아래를 향하게 된다. 기존 노크식 만년필 디자인을 더 연구해야 한다.

라이텍 노크 만년필은 고급감을 느끼기 어려운 플라스틱 패키지에 담겨 판매된다. 저렴한 가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코스메틱 브랜드가 개발했다는 스토리를 화장품과 비슷한 종이 패키지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 현행 모델의 개선이 어렵다면 고가 모델을 따로 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오늘날 만년필은 일상 속 실용성을 넘어 좀 더 특별한 취미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구로서의 성격보다는 감성을 보여주는 것이 유리하다. 두 업계의 이종 교배로 탄생한 라이텍 노크 만년필은 어떻게 강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는 감성적 잠재력을 지녔다. 이 만년필이 그저 그런 애매한 제품으로 끝날지, 색다른 선택지가 될지는 메이커의 지속적인 관심에 달려 있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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