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해가 바뀌고 새해 인사를 하느라 바빴던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나버렸다. 시간에 금을 그어놓고 새해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해가 지날수록 떨어져 가는 체력을 보면 아예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새해에는 덕담도 많이 나누고 계획도 많이 세운다. 뭔가 새로운 한 해를 내 인생의 전환기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해마다 들어서 그런지 ‘올해는 이런 걸 하겠다.’ 하는 계획들을 세우곤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다.
초심. 참 좋은 말이면서 동시에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기본적으로 잘 까먹는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거쳐서 위로 올라가면 꼭대기에 앉아서 좋은 경치를 즐기기에도 바쁜데 굳이 그 어려운 과정을 곱씹어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러고는 내려와야 할 때 길을 찾다가 깨닫는다. “아... 어디로 어떻게 올라왔지?” 하고 말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초심을 끊임없이 상기했던 사람들은 바로 길을 찾아서 안전하게 내려가겠지만 그게 아니면 산길에서 헤매기 딱 알맞다. 초심이 그래서 중요하지 않나 싶다.
생각해 보면 내 음악의 초심은 고등학교 3학년 때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전공생들과 다르게 나는 본격적으로 배움을 시작한 나이가 약간 늦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뭘 하면서 살아야겠다 혹은 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었고 고2 때 국제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고 나서야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하고 진로를 고민하여 음악으로 정했으니 10대 초반 혹은 중반에 이미 진로를 정한 친구들보다는 조금 늦은 편이다.
당시 나는 국제 교환학생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모교인 중동 고등학교에 복학하였는데 그때는 국제 교환학생 기간을 학업 기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속된 말로 1년을 꿇어버렸다. 그래서 친구들이 모두 졸업한 다음에 홀로 고3이 되니 학업은 고사하고 학교가 지루해서 죽을 맛이었고 대학 진학이나 이런 건 관심도 없어서 그냥 희망 대학 조사서에 버클리 음대 하나만 써놓고서 국내 대학 진학하지 않겠다고 담임 선생님과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선포를 해버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 유학을 고등학교에서 바로 가는 게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때였고 버클리 음대가 지금처럼 한국 학생들의 유학 기회가 많지 않았던 학교였기 때문에 나의 이런 허세가 제대로 먹혀버렸다. 나는 예체능 진학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덕분에 오전 수업만 하고 당당하게 조퇴하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나는 이 특권의 시간을 당시 재수하던 친구와 놀러 다니는 데 사용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기가 찼을 것이다. 음악 한다면서 악기를 열심히 배우는 것도 아니고 노래 연습을 핑계 삼아서 동네 노래방만 주야장천 다니고 있었으니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버클리 음대는 고사하고 꼼짝없이 노량진행 전철을 탈 판이라 일단 버클리 음대에 대해서 알아보시기로 하고 주변에다가 버클리 음대 졸업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마침 어머니 친구의 남편 되시는 분이 외교관이라 보스턴에서 영사로 있을 때 같은 성당에 다니던 분 중에 버클리 음대에 다니던 분이 마침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막 귀국하셨다고 해서 어렵게 약속을 잡고서 가기 싫다는 나의 귀를 잡아끌고 도곡동에 있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나의 초심, 그룹 다섯손가락의 기타리스트인 이두헌 사부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요즘 말로 중2병이라고 할법한 십대 특유의 껄렁한 분위기를 온몸에 휘감고 다니던 무렵인지라 당시 나는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건방졌다. 사부님의 작업실에는 사용하시던 57년에 생산된 펜더(Fender)사의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 전자기타가 있었는데 세월만큼 낡은 외관을 보고서 속으로 “아니 유명하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썩은 기타를 친다냐...”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관련 지식이 아예 없었다. 소위 얘기하는 빈티지 (Vintage) 악기가 높은 값에 거래된다는 개념을 아예 모르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원서만 내고 노래 부르면 합격 될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니, 어머니가 보시기에도 필시 한심하기 짝이 없었을 터였다. 이런 나를 앞에 두고 사부님은 학교 입학 과정과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해주셨는데 어머니는 그 순간 아들 인생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라고 느끼신 듯 사부님이 얘기하시는 중간에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초면에 죄송하지만 얘 좀 맡아서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한마디 덕분에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다. 사부님의 작업실을 들락거리며 지도를 받고, 방송국과 녹음실을 따라다니고, 작업실에 있는 음반들도 가져다가 듣고, 책도 가져다가 읽고, 심지어는 기타도 빌려 가고는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딱서니 없는 제자였지만 사부님은 항상 나를 수제자라고 지칭해 주셨고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두헌 사부님 문하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사부님이 쓰신 다섯손가락의 히트곡 <풍선>의 도입부를 보면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엔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 꿈도 꾸었지”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그 풍선을 어린 시절의 꿈으로 본다면 나에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꿈을 꾸었던 시절이 사부님의 작업실을 들락거리며 음악을 배우던 그 시절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만큼 내가 음악을 순수하게 사랑한 시절은 없는 것 같다. 사부님의 작업실에 갔다가 기타 메고 공연하러 홍대와 대학로를 들락거리던,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그 날마다가 지나고 보니 풍선을 타고 파란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이름다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나에게 초심은 25년 전 사부님의 작업실에서 기타를 배우던 그 시간이다.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를 넘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나는 그 시간에 배웠다. 물론 어릴 적 청운의 꿈인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유명해지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사람 노릇 하면서 살고 있고 어쭙잖은 지식이나마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위치에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초심의 시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졌던 또 하나의 목표 ‘사부님 같은 스승이 되기’는 아직 진행형이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의 기억에 하늘을 나는 풍선과 같은 순수함의 시간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