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었다 녹았다…예술은 끝없이 변한다는 메시지

2025-07-31

큐레이터 기피 대상 1호 한스 하케의 ‘아이스테이블’

미술계에서 작가가 이름을 알리는 것은 전시의 성공을 통해서이다. “그 전시 봤어?”라고 업계에서 입소문이 나는 것이 시작이다. 그런데 반대로 전시를 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더 유명해진 작가도 있다. 그의 이름은 한스 하케. 2년 동안 준비한 개인전이 개막 6주 전에 취소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해고를 당했다. 1971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술관 이사 비리 폭로 작품 말썽

구겐하임 개인전 6주 전에 취소

자본에 휘둘리는 제도 비판 선구

전시 안내하다 ‘게임의 법칙’ 눈떠

조국 독일의 ‘과거’ 비판한 작품

전시장이 논쟁의 공간으로 비화

현재 89세의 나이로 뉴욕에 살고 있는 하케는 현대미술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가장 검열을 많이 당한 작가이자 큐레이터들의 기피 대상 1호. 구겐하임의 전시 취소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거의 모든 미술관이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199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었고 비평가들에게는 추앙에 가까운 존경을 받아왔다.

“미술관은 비정치적 공간” 주장에 반기

그렇다면 구겐하임이 전시를 취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전시하려던 작품은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142개의 건물 사진과 부동산 정보, 그리고 거래 내역으로 구성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뉴욕 등기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의 조합이었다. 그런데 이는 사실 해리 샤폴스키라는 부동산업자가 투기를 통해 임대료 상승을 부추기고 재산을 부정 축적한 과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구겐하임 관장은 “미술관은 비정치적 공간이며 이런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한스 하케는 중립적이고 순수한 척 하는 미술관도 사실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평생에 걸쳐 드러낸 작가이다. 사실 샤폴스키는 구겐하임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보다 한 해 전에 하케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훨씬 더 논쟁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개념미술을 다루는 젊은 작가들의 단체전이었다. 하케는 ‘관람객을 참여시키는 여론조사 형태의 작품’이라는 기획안으로 전시에 참여했는데, 여론조사의 문항은 미리 밝히지 않았다. 개막 전날 공개된 질문은, 당시 뉴욕의 3선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의 연임 지지 여부를 묻는 척하면서 사실은 베트남전을 옹호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넬슨 록펠러가 닉슨 대통령의 인도차이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신이 11월 선거에서 그를 뽑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까?”

뉴욕 현대미술관은 록펠러 가문이 공동 설립하고 대를 이어 후원해 온 기관이었다. 넬슨 록펠러도 이사회의 일원이었고 그의 동생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작품을 철거하라는 압력이 가해졌지만 젊은 관장의 거부로 전시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한스 하케는 이른바 ‘제도비판 미술’이라고 하는 분야의 선구자이다. 미술계를 움직이는 권력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미술운동으로 196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사실 미술관은 정치나 사회적 문제와는 동떨어진 고상한 별세계라는 이미지가 있다. 사람들이 여가를 보내고 교양을 쌓기 위해 방문하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걸려 있는 세련된 공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고급문화를 다루면서도 공공성을 지니는 미술관의 선하고 우아한 이미지는 종종 권력이나 자본에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데이비드 록펠러는 후원 등의 형태로 예술에 관여하는 것이 기업의 이미지 홍보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피력한 바 있다. 이렇듯 예술도 사회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며, 권력이나 자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제도비판 미술의 주된 목적이었다.

하케는 어쩌다 이런 작품들은 만들게 되었을까? 1936년에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쾰른 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나치당 가입을 거부하여 직업을 잃었다. 하케는 카셀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이 시기에 학과 교수가 기획한 지역 미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 축제가 된 카셀 도큐멘터의 두 번째 전시였다.

전시장을 지키고 작품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안내하면서 그는 미술계를 움직이는 ‘게임의 법칙’에 눈을 떴다. 미술관이라는 공적 영역이 상업화랑·컬렉터·언론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인지한 것이다. 이 경험은 그가 훗날 제도비판이라는 영역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초기엔 자연과학 응용한 개념미술

대학 졸업 후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하케는 뉴욕에 정착했다. 초기 작품은 주로 자연계의 물리 법칙을 이용한 개념미술적 성격을 띠었다. 이 시기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도 한 점 소장되어 있다. 얼음으로 뒤덮인 스테인리스 조각으로 내부에 냉각 시스템이 들어 있어 전시장 환경에 따라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작품이다.

그가 60년대에 만든 이런 작품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에 도전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은 처음에 제작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의 흐름, 그리고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에 반해 하케가 지향한 것은 단 한 순간도 똑같지 않은, 끊임없이 상태가 변화하는 예술이었다. 마치 생물처럼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을 하는 예술. 이는 결국 예술도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적 시스템의 일부라는 논리로 발전했다.

1970년대부터 하케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뉴욕 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의 전시 작품이었다. 이는 물론 자연계 법칙을 이용한 이전의 작품과는 차원이 다른 파장을 일으켰다.

구겐하임 사건으로 전시가 취소된 후 하케는 어려움을 겪었다. 전시 기회는 끊어지고 작품도 팔리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 비평가들은 그의 개념적 완결성과 날카로운 비판의식, 그리고 금기에 도전하는 예술 정신에 열광했다.

1993년에는 백남준과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선정되어 그해 최고의 국가관에 수여하는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때 전시한 하케의 작품은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국가관을 단순히 전시장이 아닌, 그 자체로서 논쟁적인 공간으로 접근한 최초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은 ‘게르마니아’. 나치 시대에 베를린을 칭하던 이름이었다. 히틀러는 1934년에 무솔리니를 만나러 베네치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화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비엔날레가 궁금했는지 전시장을 둘러보았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비엔날레 독일관의 리모델링을 지시했다.

하케는 히틀러가 만든 대리석 바닥을 깨부숴 뒤엎고, 입구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만남을 촬영한 1934년의 흑백사진을 걸었다. 전시장 바닥은 깨진 대리석판 조각으로 뒤덮여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안개처럼 떠다녔다. 관람객들이 깨진 대리석판을 밟고 다니는 소리가 조용한 전시장에 울려 펴졌다. 히틀러가 만든 어떤 것을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밟고 다니게 만든 이 작품은 묘한 감동을 주는 전시 경험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하케는 이렇듯 예술도 사회 시스템의 일부임을 드러냄으로써 예술이 정치와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제도비판 미술의 이상을 가장 가차 없이 일관되게 실천한 작가로 평가된다.

‘예술로 세상 개선’ 의지 투영한 작업

그런데 과격하고 무자비해 보이는 하케의 작품은 사실 예술의 역할에 대한 이상주의적 신념, 즉 예술로써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에 기반한 것이다. 그가 2000년에 독일 국회의사당 안뜰에 설치한 작품이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이 건축물 입구에는 ‘독일 국민에게’라는 석조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케는 의사당 안뜰 바닥에 이 명문과 같은 글자체로 ‘주민들에게(Der Bevolkerung)’라는 커다란 글자를 흰색의 네온 조각으로 설치하였다.

이 작품은 ‘국민’ 대신 ‘주민’이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독일 내에서 다시금 득세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이민자들을 포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글자 주변에는 연방의회 의원들이 각 지역구의 흙을 가져와 물리적으로 섞은 후 온갖 식물이 자유롭게 자라도록 설계했다

이 작품은 당시 의회 다수당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CDU)이 강하게 반대하여 격론 끝에 찬반 표결에 부쳐졌다. 그런데 이 당 소속 의원 두 명이 당론과는 달리 찬성표를 던져 단 2표 차이로 구현될 수 있었다.

작품이 설치된 후에는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도 지역구에서 흙을 가져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다양한 지역의 흙 속에 섞여온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새로운 생물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매일 웹캠으로 촬영한 사진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어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과격한 비판가의 더없이 따뜻하고 희망찬 이 작품은 인종과 세대, 성별 간 갈등이 심화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