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무역협상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되고 달러화 가치가 떨어졌지만 원화는 여전히 약세를 이어가고 있다. 달러 매도 자금이 엔화와 유로화에 집중되고 있는데다 저성장 우려 등으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향후 원·달러 환율은 G20 재무장관회의와 한미 2+2 통상협의에서의 관세협상 및 달러화 관련 논의결과에 따라 방향성이 결정될 전망이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전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1.5원 오른 1420.6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환율은 오후 3시쯤 1418.2원까지 내려갔다가 마감 직전 다시 상승 전환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 2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JP모건체이스 비공개 행사에서 "중국에 대한 현재의 관세 대결은 지속 불가능하고, 미중간 무역 전쟁은 가까운 미래에 완화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언급했다. 무역협상 진전에 대한 기대감이 위험자산 선호 심리를 자극했지만 원화 가치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 4주 연속 하락한 달러화 지수는 2022년 3월 이후 최저치인 98.14p까지 내려앉았다. 상호관세 발효 이후 불안해진 미국증시와 미중 갈등 격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파월 의장간 신경전 등이 달러화 약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미국 경제 둔화에 대한 우려로 연준의 추가 긴축 가능성이 낮아지고 미·중 무역갈등 완화 기대까지 더해지면서 안전자산인 달러에 대한 수요가 쪼그라든 모습이다.
달러화 매도 자금은 원화가 아닌 엔화와 유로화에 쏠리고 있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정치적 안정성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일본 엔화 역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전통적인 안전자산으로 인식돼 왔고, 일본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기대가 엔화 수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경제 펀더멘털·외인 수급·위안화 절하에 밀린 원화
달러화 가치가 떨어졌는데도 원화가 오르지 않는 배경으로는 외국인 투자자 이탈이 첫손에 꼽힌다. 지난 23일 외국인 투자자는 코스피 시장에서 2512억원을 순매도하며 8거래일 연속 매도세를 이어갔다. 한국 경제에 대한 눈높이가 낮아지고 한미 간 금리차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진 결과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 수요가 집중되는 기간이 도래했고 주식시장에서의 자금 유출 압력이 여전히 우세하다"며 "미국 증시 저가 매수세가 더해지며 최근 3개월 누적 해외주식 순매수 규모(130억달러)는 2020년 이후 가장 가파른 속도"라고 분석했다.
위안화의 약세 흐름도 원화를 짓누르는 배경 중 하나다. 원화와 연동성이 높은 위안화는 최근 중국 경기 둔화 우려와 미국의 금리 인하 지연 가능성 등으로 상방이 막혀있는 상황이다. 미중 협상에 진전이 있다는 기대는 외환시장에 긍정적인 신호였지만 외국인의 지속적인 매도와 위안화의 추가 약세 우려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단기적으로 환율의 변동 폭은 더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미·중 무역협상 결과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주요국 경기 지표 발표나 통화정책 변화에 따라 시장 심리가 수시로 출렁일 수 있어서다.
G20·한미 통상 협의 주목···외환시장 방향성 시험대
원·달러 환율은 당분간 하방이 제한된 환경에서 등락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협상에 뚜렷한 진전이 나타나거나 국내 경제 펀더멘털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원화 약세를 되돌릴 만한 계기가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원·달러 환율의 방향성을 결정할 변수로는 23일부터 이틀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G20 재무장관회의가 꼽힌다. 이번 G20 회의에서 일본은 엔화 약세에 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미국과 통화 관련 협의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상호관세 및 달러화 관련 논의와 미일·한미 재무장관회의에서의 엔·원화에 대한 언급이 외환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특히 G20 재무장관회담에 참석하는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는 오는 24일(현지시간) 예정된 '한미 2+2 통상 협의'에 나선다. G20 회의 개최에 맞춰 진행돼 온 한미 재무장관 회의에 관세협상을 위해 통상 책임자까지 참여한다.
이번 협의에서 미국의 상호 관세 부과에 대한 완화나 철회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가 나올 경우 한국의 수출 전망이 개선돼 원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미국 측이 한국의 환율 정책을 압박하거나 구체적인 합의가 도출되지 않으면 원화 가치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미일 재무장관 회담 결과와 외환시장의 반응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며 "엔화 추이와 더불어 위안화의 추가 약세 폭 확대 여부도 주목해야 할 변수이며, 이번주 원·달러 환율 밴드는 1400~1450원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