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주장하는 ‘미국 우선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경제나 안보에 악영향이 없다면 국제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전통적 고립주의 대신 군사력을 토대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팽창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는 모양새다.
북극의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미국이 건설·운영해 왔으나 소유권이 파나마로 넘어간 파나마운하에 대해서도 미국 선박에 대한 과도한 비용 부과와 중국의 영향력 등을 내세워 통제권 확보에 나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100여년 전 제국주의 시절 미국 주변 지역과 태평양으로 확장을 시도하던 팽창주의 기조가 뚜렷해지고 있다.
자유 세계의 지도자가 아닌 미국이라는 패권 국가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더욱 두드러지는 셈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보인다
트럼프 당선인은 유럽 안보 문제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의 역할을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7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이뤄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3자 회동에서 “우크라이나의 방어와 지원에 유럽이 주된 역할을 맡아야 하고, 유럽의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며 휴전 상황을 감시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반면 캐나다, 그린란드, 멕시코, 파나마 등 아메리카 대륙과 인근 지역엔 적극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군사력이나 경제적 압박 수단의 사용을 배제한다고 약속할 수 없다면서 위협 수위를 끌어올렸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까지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식민지 개척식 팽창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매킨리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푸에르토리코·괌·필리핀을 점령했으며, 경제적으로는 관세 정책을 적용한 바 있다.
루스벨트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 문제에 개입하는 한편 러·일전쟁 직후 포츠머스조약을 주선했다. 해군력 강화에 나서서 ‘대백색함대’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했고, 중남미와 태평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캐나다와 그린란드, 파나마운하를 거론하는 트럼프 당선인의 행보도 이와 유사하다는 평가다.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에 대해선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는 등 미국의 안보부담을 낮추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대신 미국 본토에서 가까운 지역에 대해선 다른 나라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는 트럼프 당선인이 주장하는 미국 우선주의가 기존에 미국이 행사하던 글로벌 영향력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다. 미국 본토와 인접한 곳에 힘을 집중해서 지정학적 팽창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면,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 지역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같은 방식이 불러올 부작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와 인접한 조지아, 우크라이나 등을 대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고 외교적 압박을 가하면서 영토와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러시아의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100여넌 전의 팽창정책을 재연한다면, 미국이 지금까지 내세웠던 자유와 민주주의, 주권의 가치 대신 미국의 이익을 먼저 따진다는 이미지가 세계에 퍼질 수 있다.
◆미국도 중국도 상대는 하나뿐
팽창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는 트럼프 당선인은 매킨리·루스벨트처럼 아메리카 대륙과 더불어 태평양에서도 적극적인 행보를 펼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태평양 진출을 꾀하는 중국과의 갈등 수위를 한층 높일 전망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인사들은 잇따라 중국에 대한 경계성 발언을 내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미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을 맡게 된 엘브리지 콜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외신에 따르면, 콜비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며 “나토가 유럽에서의 역할을 확대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줘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더욱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유럽과 중동보다 아시아에 더 많은 자원과 영향력을 투입해야 하며,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 위협은 한국이 스스로 대응해야 할 책임이 있고, 주한미군은 북한보다는 중국에 대해 억제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 지명자도 14일(현지시간)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공세를 억지하기 위해 파트너 및 동맹국과 함께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헤그세스 지명자는 “트럼프 당선인은 선박 건조가 절대적인 최고 우선순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며 “신속한 투자가 필요하고 해외 기업들을 장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군력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현재 태평양에서 미국은 대규모 군사기지와 항공모함 등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은 미사일과 잠수함 등의 비대칭 무기를 앞세우며 미군을 견제하고 있다.
미국이 질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중국은 양적 측면에서 앞서고자 군비 증강을 진행 중이다. 대량의 구축함과 호위함이 건조됐고, 무인기를 띄울 수 있는 076형 강습상륙함을 비롯한 신형 함정 건조도 이뤄지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유사시 대만 해협과 서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장악, 미군의 개입을 저지하고 유사시 대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최근 중국에선 대만 상륙작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도 드러났다.
미국 군사전문매체 디펜스뉴스에 따르면, 중국 남부 광저우의 조선소에서 특이한 형태의 바지선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바지선의 앞쪽엔 길이 120m의 램프(경사로)가 있고, 뒤쪽에는 다른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
상륙함이 해당 바지선의 뒤쪽에 접안해서 차량 등을 내려놓으면, 차량들은 바지선을 통과해서 120m 길이의 램프를 따라 해안에 상륙하는 방식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됐던 멀베리 항구와 유사한 기능이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을 통해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하기 위해선 항구를 신속하게 점령해야 했다. 접안시설이 없는 해안에서 병력과 물자를 내려놓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과의 전투로 신속한 점령은 불가능했므로, 해안에 인공항구를 만들어서 전차 등의 중화기를 상륙시키기로 했다. 이것이 멀베리 항구다.
멀베리 항구 덕분에 연합군은 10개월 동안 장병 250만명, 차량 50만대, 물자 400만t을 수송할 수 있었다.
중국이 만드는 특수 바지선도 마찬가지다. 대만 본섬에는 상륙 작전에 적합한 해변이 많지 않다. 상륙이 가능한 해변은 대만군이 강력하게 방어할 수 있다. 이는 중국군의 대만 상륙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특수 바지선은 이같은 제약을 돌파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예전에는 상륙작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바위가 많거나 진흙으로 구성된 해변에도 상륙할 수 있다.
긴 램프를 이용해 바위나 진흙 지대를 건너뛰어서 전차와 장갑차를 단단한 지면이나 해안 도로로 직접 운반할 수 있습니다.
중국군은 새로운 상륙 지점을 선택할 수 있고, 대만의 항구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된다. 대만군은 해안방어 작전에 한층 부담이 커진다.
중국의 군비 증강 조짐에 맞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태평양 지역 동맹국들을 한데 묶어 중국을 견제하는 행보를 취했다. 영국, 호주와 함께 오커스(AUKUS)를 조직해 호주에 핵추진잠수함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 같은 기조를 계승해서 중국에 맞선다면, 태평양에서 미·중 갈등 수위는 한층 고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 직후 미국의 대외 정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놓고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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