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암호화폐 정부'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암호화폐 정책을 검토할 실무그룹(워킹그룹)을 신설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암호화폐·인공지능(AI) 차르'인 데이비드 색스가 배석한 가운데, 실무그룹을 신설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명령에는 암호화폐 업체를 위한 은행 서비스가 보호받도록 하고, 민간 암호화폐 유통을 돕기 위해 중앙은행의 디지털 통화 창설을 금지하는 내용도 같이 담았다.
앞으로 실무그룹은 디지털 자산 관련 정책에 대해 백악관에 조언한다. 여기에 재무부·법무부·증권거래위원회(SEC)·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등 정부 기구들도 관여한다. 향후 6개월 안에 실무그룹은 입법 제안을 담은 보고서를 트럼프에게 제출할 예정이다.
이날 트럼프는 'AI 관련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장애물 제거'로 명명된 행정명령에도 서명해 국가 차원의 디지털 자산 비축에 시동을 걸었다. 명령엔 "미국의 AI 혁신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AI 정책과 지침들을 철회해 미국이 AI에서 세계적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길을 트는 것"이란 내용이 담겼다. 또 당국자들에게 이를 위한 행동계획을 180일 이내에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앞서 트럼프는 행정명령을 통해 국제기구 '줄탈퇴'를 선언했는데, 이와 관련한 후속 조치도 이어졌다. 파르한 하크 유엔 사무총장 부대변인은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통지하는 미국의 서한을 받았다"고 이날 밝혔다. 미 의회가 1948년 미국의 WHO 가입을 승인하면서 통과시킨 공동 결의에 따라 미국이 WHO에서 탈퇴하려면 서면으로 1년 전에 통지하고 WHO에 남은 회비를 납부해야 한다. 해당 서한의 송부일이 22일이기 때문에 실제 미국의 WHO 탈퇴는 내년 1월 22일이 될 전망이다.
미국이 WHO의 최대 분담금(총 예산의 약 18%)인 만큼 탈퇴 이후 세계 보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또 분담금 2위국인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미국 내에서 나오고 있다.
공화, 트럼프 공약재원 마련 검토
이런 가운데 트럼프가 선거 때 내건 공약을 이행하는 데 드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의회 내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공화당이 10% 보편관세 부과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프로그램 예산 삭감 을 위한 입법 지원을 빠르게 검토 중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공화당 소속 하원 예산위원회 의원들은 트럼프의 세금 감면과 국경 공약에 들어가는 비용을 추산해, 이 비용만큼 예산을 줄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나열한 50장짜리 목록을 최근 회람했다.
목록에는 10% 보편관세 부과를 통해 향후 10년간 1조9000억 달러(약 2729조원)를 걷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이 담겼다. 또 중국에 대한 '무역법 301조' 관세를 법제화하고 세율을 올리면 10년간 1000억 달러(약 143조원)의 관세 수입을 얻을 걸로 봤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인 IRA의 청정에너지 세액공제를 없애면 10년간 7960억 달러(약 1143조원)를 아낄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트럼프의 공약을 이행할 때 정부 지출을 늘리는 건 최대한 막겠다는 공화당 지도부의 판단과 맞닿아 있다. 공화당이 근소한 차이로 하원 다수당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데, 재정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는 공화당 의원 일부가 이탈하면 자체적인 법안 처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약 이행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든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시행돼 올해 만료되는 감세안을 연장하는 데만 10년간 4조 달러(약 5747조원)가 들 전망이다. NYT는 "트럼프 정책들이 36조 달러(약 5경1760조원)인 미국의 과도한 국가부채 탓에 이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짚었다.
출생시민권 제한엔 법원 제동
트럼프가 쏟아내는 '무더기' 행정명령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일부 사안의 경우 법원이 제동을 거는 상황도 생겼다. 이날 시애틀 연방법원의 존 코에너 판사는 워싱턴·애리조나·일리노이·오리건주(州)가 트럼프의 '출생 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에서 이 행정명령의 효력을 14일간 차단한다고 결정했다.
트럼프가 취임 첫날 내린 이 행정명령은 부모가 불법 체류자일 경우 미국에서 태어나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 골자다. 어머니가 합법 체류자라고 해도 일시 체류자 신분이고, 아버지가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고 측인 각 주의 법무장관들은 소장에서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미국에 귀화한 모든 사람은 미국과 그 거주하는 주(州)의 시민'이라고 확인한 수정헌법 제14조에 비춰 이 행정 명령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코에너 판사의 이번 결정은 행정명령 시행을 당장 막아달라는 원고 측의 요청을 일부 받아들여 긴급 차단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이후 추가로 행정명령 시행을 막을지 여부는 내달 5일 심리에서 결정된다. CNN에 따르면 코에너 판사도 해당 명령이 "명백히 위헌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