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재 유산’에 주목하는 이유

2025-04-03

코로나19 이후 내내 부진을 이어왔던 내수가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대형 악재 속에 더 쪼그라들고 있다. 기업들은 돈줄을 바짝 죄고 있다. 미래 투자보다 당장 지갑 사정이 급해져서다. 우려했던 대로 트럼프 정부는 2일(현지시간) 한국에 상호관세율 26%를 부과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상대국 중 가장 높다. 주요 기업이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베트남(46%)과 중국(34%), 인도(27%) 등에 떨어진 관세율도 상당해 직격탄과 곡사포 ‘두 방’을 한꺼번에 맞은 셈이 됐다. 중국, 유럽연합(EU), 아세안이 보복관세로 맞대응할 경우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내수와 투자, 수출 모두 ‘위기 사이렌’이 요란하니 난제를 해결할 만한 인물을 찾게 된다. 그러다가 파스퇴르유업을 창업하고, 1000억원을 들여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한 고(故) 최명재(1927~2022) 회장이 떠올랐다. 1990년대 그 유명한 ‘우유 전쟁’을 벌였고, 무학년제·영어 상용화 등으로 ‘민사고 실험’을 펼친 주인공이다.

거침없는 공격으로 시장 만들고

위기 속에도 ‘대체 불가’ 존재감

트럼프 관세전쟁서 교훈 삼아야

그의 이단아 기질과 성과에 먼저 주목한다. 최명재는 싸움꾼이었다. 중동에서 운수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팜스프링스 목장에서 휴가 즐기는 모습에 꽂혀 강원도 횡성 덕고산 자락을 개간했다. 이곳의 목장을 근거 삼아 파스퇴르유업을 세웠다. 이때가 1987년, 나이 예순이었다.

그는 우물 같이 고요하던 시장에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다. 섭씨 65도에서 30분간 가열해 살균하는 저온살균 우유를 국내 처음 선보였다. 당시엔 고온 살균법만 존재했다. ‘진짜 우유’ ‘고름 우유’ 등 논쟁적인 내용의 신문 광고를 통해 ‘업계 형님들’에게 돌발했다. 지금도 소비재 마케팅 역사에서 미원·미풍 간 ‘조미료 전쟁’ 이후 가장 요란했던 사건으로 회자된다.

이런 그에게 고집쟁이, 돈키호테라는 별명은 약과였다. 정신병자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그 괴팍한 기질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보란 듯 키워냈다. 설립 당시 연 5억원이었던 ‘듣보잡 회사’ 파스퇴르의 매출은 이듬해 월 5억원, 그다음 해 월 100억원을 찍었다.

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브랜드와 저온살균 공법, 민사고를 모두 지키고 싶어했다. 그의 지인인 소설가 이청은 ‘최명재의 실패’를 올리버 스미스 장군의 장진호 전투에 빗대서 설명한 적이 있다. 스미스는 미 해병 1사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후퇴를 죽음보다 모욕으로 여기는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는 중(We’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최명재에겐 부도가 끝이 아니라 ‘평생 일군 결과물을 지켜내겠다=새 방향으로 공격하겠다’는 의미라는 얘기다.

파스퇴르는 1998년 1월 부도를 낸다. 막내딸 저금통까지 털어 넣었지만 소용없었다. 스무 평 아파트에 칩거하던 노(老) 경영인을 불러낸 것은 채권단이었다. 그는 “(당시 개교 2년 차인 민사고는)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 같은데 어떻게 손을 놓을 수 있냐”고 채권단을 설득해 ‘민사고 지원’ 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는 포기를 몰랐다.

최명재는 회사를 다시 일으키지는 못했다. 나중에 채권단 요구로 민사고 지원도 끊었다. 불의의 화상 사고를 당해 말년은 괴로웠다. 파스퇴르는 이후 주인이 두 번 바뀌면서 현재 롯데웰푸드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브랜드와 공법은 변함이 없다. 파스퇴르는 한 해 매출 2000억원, 영업이익 140억원을 거두는 효자 사업부다. 학생 등록금과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민사고도 건재하다. 그에겐 ‘실패 기업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두 개의 유산은 오롯이 남았다.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최명재식 ‘새 방향으로 공격’이 성공한 셈이다.

조만간 한·미 양국이 관세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것이다. 이제 본게임 시작이다. 미국과 협력의 새 판을 짜야 한다. 협업 파트너로서 한국의 ‘대체 불가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조선 산업이 대표적이다. 중국과의 신냉전을 치르는 미국 입장에서 K조선은 건조 능력과 비용·효율 등에서 ‘매력 덩어리’다. 에너지와 소형모듈원자로(SMR) 협력 등에선 서로 교집합이 많다. 동병상련 처지인 일본과도 협력이 필요하다.

지난 1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재계 총수들과 만나면서 경제안보 TF를 가동했다. 국정 리더십 공백 속에서 뒤늦게나마 민관이 원팀으로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새 먹거리 발굴과 관세 대응 모두 속도와 밀도를 높여야 한다. 과감한 개척과 확실한 존재감, 실패 기업인이 남긴 ‘유산’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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