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90년 5월 청와대와 외무부(현 외교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국빈 방일이 예고된 가운데 일왕(日王)의 과거사 관련 발언 수위에 정치권과 언론의 이목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어떻게든 국민이 만족할 정도의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며 외무부를 닦달했다. 외무부는 일본 측에 “늦어도 5월20일까지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발언을 제시해 달라”며 아예 시한까지 못박아 요구했다. 그 만큼 국내에서 반일 감정이 치솟고 있었으며, 청와대로선 이를 정권 존립에 대한 위협 요인으로까지 받아들였다.

그런 가운데 일본 신문에 한국을 자극하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 정부가 ‘금세기의 한 시기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던 데 대해 마음 아픈 생각이 듭니다’라는 말을 일왕의 사죄 표명 문안으로 마련했다”는 내용이었다. 청와대는 분노했고 국민 여론도 들끓었다. 한 국내 신문을 보면 정부 고위 관계자가 “(일본 측 문안은) 전혀 진전된 내용이 아닌 것으로 본다”며 “반성과 책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수시로 청와대에 들어가 노 대통령에게 일본과의 협상 진행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노 대통령 방일을 코앞에 두고 주한 일본 대사가 최 장관에게 통보한 일왕의 최종 사과 문안은 이것이었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일제강점기)에 귀국(한국)의 국민들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념(痛惜の念)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통석의 념’이란 매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일본 측은 ‘잘못을 아픈 마음으로 뉘우친다’는 의미라고 부연했다. 다만 한국인들에게는 퍽 생소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회고록에서 최 장관은 ‘일본이 무슨 저의로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이런 문구를 애써 찾아낸 것일까’ 의아하게 여겼다고 술회했다.

1990년 5월24일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노 대통령 일행을 위해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 주최로 궁중 만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왕은 예정대로 ‘통석의 념’이란 문구가 포함된 사과 발언을 했다. 외교부는 일왕의 만찬사 내용을 언론에 알리며 통석의 념이란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국내 반응은 싸늘했다. 한 신문은 “억지 해석으로 사죄를 받은 것처럼 생색을 내려는 작태”라며 ‘통석을 애석하게 여김’이란 제목의 사설까지 게재했다. 오는 24일이면 ‘통석의 념’ 발언이 세상에 알려진 뒤 꼭 35년이 된다. 한·일 수교 60주년이라고 해서 뭔가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을까 싶었던 양국 관계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통석의 념’이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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