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 건선 가볍다고?” 환자 두번 울리는 중증도 분류기준[메디컬 인사이드]

2024-11-14

“그릇을 싹 비우고서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웃음 짓는 손님들을 보는 게 가장 큰 보람이죠. 그 순간 때문에 버텨왔는데, 이제 그만 가게를 접어야 하나 싶어요. ”

서경제(36·가명) 씨는 양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보이며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른 나이에 요식업계에 뛰어들어 본인 명의의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서씨에게 말못할 고민이 있다. 요리 연습에 매진하며 오너 셰프의 꿈을 키우던 20대 때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선 탓이다. 무릎과 팔꿈치 부위 피부가 거칠어지고 붉은 기가 올라오나 싶더니 오백원짜리 동전 크기 만하게 은백색의 각질(인설)로 덮인 붉은 반점(홍반)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처음에는 피부가 건조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무심코 각질을 뜯어내다 피가 나니 덜컥 겁이 났다. 검붉은 반점이 사라지질 않아 병원을 찾은 서씨는 그제서야 ‘건선’이라는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됐다.

◇ 단순 피부병 아닌 면역질환…완치 어려워 평생 관리 필요

건선은 면역세포의 이상으로 전신 염증이 증가해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피부질환이다. 서씨의 몸 구석구석에 생긴 검붉은 반점은 건선 병변의 각질을 인위적으로 떼거나 벗겨냈을 때 나타나는 점상출혈이었다. 피부 표면이 얇아지면서 진피층의 혈관이 노출돼 건선 환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전문용어로는 ‘아우스피츠(auspitz)’ 징후라고 한다. 서씨는 “억지로 각질을 떼어내면 상처가 생긴 자리에 건선이 생기거나 2차 감염이 생겨 온몸으로 번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상했다. 요리사에게 청결과 위생은 생명과도 같다. 피부에 좁쌀 같은 발진이 생기고 수시로 각질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병이 생겼다니 요리사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좌절감마저 들었다.

방철환 서울성모병원 피부과 교수(대한건선학회 정보이사)는 “건선 환자들은 도드라지는 피부 병변으로 인해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사회생활과 생업에도 지장을 받는다”며 “잘 씻지 않아서 생긴다거나 전염되는 질환으로 오해하는 등 사회적 편견이 환자의 삶의 질을 더욱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 대부분 20~30대에 갑자기 발병…사회생활에도 지장

건선의 발병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타고난 면역체계 불균형에 기인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체내 면역을 담당하는 Th1·Th17 세포가 활성화되면서 여러 염증성 물질을 분비해 각질 세포가 증식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과 함께 문신 같은 피부 외상, 감염, 차고 건조한 기후, 특정 약물, 스트레스 등이 건선을 악화 또는 유발하는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건선의 대표 증상은 피부 가려움이다. 그러나 피부 외에도 관절, 심혈관계 기관 등 전신에 영향을 준다. 건선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관절 변형, 심근경색, 뇌졸중, 당뇨병, 염증성 장질환,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대사증후군 등 각종 질환이 동반될 위험이 훨씬 높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대한건선학회에 따르면 건선은 세계적으로 3%의 유병률을 보인다. 국내 유병률은 그보다 적은 1~2% 수준으로 추정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매년 15~16만 명이 건선 진료를 위해 병의원을 찾는다. 대부분 사회활동이 왕성한 20~30대에 갑자기 발병하다 보니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서씨는 요리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십수년간 건선과 이별하기 위해 민간요법부터 온갖 치료법을 시도한 결과 건선 증상도 크게 호전됐다. 서씨는 “혹시라도 위생상태가 불결하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식당에서는 장갑을 벗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부위와 달리 손바닥에 생긴 건선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식당을 운영하는 날은 보통 하루 6~7시간, 길게는 8시간 넘게 장갑을 낀 채 요리를 해야 한다. 영업을 마치고 나면 장갑 안에 습기가 차올라 피부 자극이 심했다. 손이 너무 쓰라려 하루를 통째로 쉬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방 교수는 “건선 발병 기전에 관여하는 주요 경로를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생물학제제의 등장으로 과거보다 높은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손·발바닥이나 두피, 손톱, 생식기 등에 생기는 ‘특수 부위 건선’은 상대적으로 치료 반응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 건선학회, ‘특수 부위 건선’ 포함…새로운 ‘중등증~중증 건선 기준안’ 마련

현재 국내에서는 병변이 생긴 체표면적(BSA)과 홍반·각질·두께의 심각도, 병변의 넓이, 부위별 가중치를 곱한 값인 건선 중증도 지수(PASI)를 토대로 건선의 중증도를 평가한다. PASI 10점 이상, BSA 10% 이상의 2가지가 필수 조건이고 임상의사의 진찰 소견과 삶의 질 평가 10점 이상을 부가 조건으로 충족해야 중등증~중증 건선으로 분류된다. 병변의 침범 면적이 적은 ‘특수 부위 건선’은 중증 질환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생물학제제 등 각종 치료를 받을 때도 건강보험을 적용받는 데 제약이 따른다. 방 교수는 “건선은 일시적으로 병변이 사라진다고 해서 치료가 끝나지 않는다. 계속 재발하기 때문에 고혈압, 당뇨처럼 평생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며 “특수 부위 건선이 생긴 환자들은 고통이 심한데 제도적 한계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대한건선학회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최근 새롭게 합의된 ‘중등증~중증 건선 기준안’을 내놨다. 종전보다 중증도 점수의 개수를 줄이고 환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특수 부위의 건선을 포함시킨 것이 핵심이다. 그는 “유럽 등 국제 학술단체들은 이미 건선의 중증도 조건을 완화하고 특수 부위 건선을 중증 단계로 포함하는 추세”라며 “더 많은 건선 환자들이 질환을 극복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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