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완전한 영혼>에 실린 중편 ‘얼음의 집’의 주인공은 고문 가해자다.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배출한 최고 ‘전문가’다. ‘얼음의 집’은 고문자의 시선에서 권력과 인간의 몸, 고통에 대해 탐구한다.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독자의 몸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악을 드높이는 문학의 곡예”라고 평한 바 있듯, 이 작품은 행간마다 사유의 밀림으로 가득 차 있는 단순한 걸작을 넘은 명작(銘作)이다.
고문 기술자는 고문 대상자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 완벽한 권력이다. 내 생각에 작품의 요지는 그런 권력에도 사상이 있다는 것, 아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자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소설가의 문장을 보자. “문득문득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권력의 쾌락을 끊임없이 지워야 하는 그 혹독한 인내. 물론 나는 훌륭히 견뎌내었다.”
고문 기술자에게 고도의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직업윤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 노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작업’을 그르치는 일의 특성 때문이다. 고문(拷問)이란 말의 의미에서 보듯, 고문은 상대를 신문하는 것이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쾌감에 젖어 고문 대상자를 죽이는 것은 하수(下手)의 짓이다(이 작품은 1987년 사망한 고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얼음의 집을 짓고자 하는 고문 기술자는 말한다. “폭력의 쾌락은, 그 욕망은 죽음을 지향한다. 죽음이야말로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이다. 하지만 고문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다. 정보의 획득과 정신의 해체와 파괴다. 해체와 파괴를 통해 체제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지키는 것이다. 고문은 처형이 아니다. 고문자가 고문 대상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조직의 명령과 규칙을 깨뜨리는 행위다. 그러므로 고문자는 고문 대상자의 죽음에 대한 저항력을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얼음의 집’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력의 유한성을 주장하거나 권력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권력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기존 방식과 접근을 달리한다. 권력이 주는 쾌락과 무한한 자유는, 절제와 판단이라는 사상이 없다면 폭력일 뿐이다.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는 절제력이 고문 기술자 사상의 핵심이다.
“고문자는 고문 대상자에게 전지전능한 존재다. 고문자의 쾌락은 전지전능한 존재의 감각에서 솟아오른다. 그는 고문 대상자를 죽이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고문 기술자는 기술의 대상과 도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사물을 알지 못하면 기술의 맥을 짚을 수 없다.”
고문 가해자의 사상에서 배울 점
이 작품이 탐구하는 고문은 권력과 통치의 거대한 비유다. 소설에서 논하는 고문 가해자와 고문 피해자를 최고 통치자와 국민의 관계로 환언해보자. 통치자가 대상과 도구에 대해 알지 못할 때, 즉 사상을 갖추지 못하면 국민은 ‘죽고 만다’.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얼음의 집’이 말하는 ‘권력자의 사상’이 없는 행위였다. 작품의 비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실제 “처단”의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 이 공포와 놀라움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계엄 트라우마의 실체다.
권력 행사를 둘러싼 사상은, 통치자나 각종 조직 내 상층부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사용하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개인의 삶은 그가 맞닥뜨리는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보면 그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자인 상대를 포착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사람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주어진 권력과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얼음의 집’ 주인공은 고문 기술의 사제 관계인 스승 하야시 세이코와 제자인 ‘나’다. 하야시가 일본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만들어진 최하층 천민 계급인 ‘에타’ 출신이고, ‘나’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일본 근현대사에서 에타와 재일 조선인은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에의 욕망이나 복수의 일환으로써 고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며 자신의 일을 장인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최대로 사용하고,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일단, 자신의 권력을 측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실천이다. ‘나는 권력자’라는 전제에서, 모든 사회관계의 맥락과 양상을 고려해야 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상당한 자기 돌봄(성찰)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다.
당대가 지옥인 이유는 자신이 가진 권력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조가 인간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갖는다. 비대한 권력자/가해자가 피해의식을 가질 때는 참극이 시작된다. 나는 그 표본이 윤석열 대통령 부부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절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윤석열 부부와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의힘, 관료들, 광장으로 나온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개인 윤석열’은 평생 한 번도 자기 판단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인물로 보인다. 김건희씨를 포함한 그를 둘러싼 이들은 보수인가. 그렇다면 이들에게 보수의 사상이 있는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분단인 이유는 진보와 보수가 남한 사회 내부의 계급 갈등으로부터 형성되기보다는 북한을 이용하는 이들로부터 결정되기 때문이다. 분단사회에서 이념은 개인의 일상으로부터가 아니라 분단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보수가 많고, ‘강남 좌파’도 가능하다.
보수의 사상, 그 구체성을 원한다
한국의 보수가 사상이 없는 이유는 사상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없어서이다. 대신 “빨갱이” 운운하면 모든 논쟁은 끝이다. 이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폭력의 힘, 고문과 같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내용과 지조가 없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특히 윤석열 정부는 통치 기술과 도구는 없고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만 있었다. 그들의 자유는 집권 과정과 이후까지, 무임승차 그 이상이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를 길거리에서 주웠다. 무임승차가 지속되다 보니 이들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창조경제” “통일 대박론”, 이명박 정부 때는 “녹색성장”이라는 구호라도 있었지만, 윤석열 정권은 내내 대통령 부부를 둘러싼 부패 루머밖에 없었다.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 1인 시위를 하며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이견을 냈던 김상욱 의원(울산 남구갑)은 인터뷰에서 “건강한 보수는 공정, 자율, 개방성”을 추구한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월8일자). 나는 그의 실천이 가치 지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리나 당략을 떠난 가치는 실현하기 어렵고, 결국 개인이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바람직한 가치 지향적 정치는 자기 사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보수나 극우는 구체성이 없다. 통치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그 자체로 통치 도구인 고문 기술자에게도 사상이 있는데 보수는 사상이 없다. 구체성이 없기에 무엇에 반대하거나 찬성할 뿐이다.
‘얼음의 집’에 등장하는 고문 가해자는 그들이 가진 권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권력 때문에 자기 위치의 의미를 알고자 몸부림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들 ‘논리에 설득된다’. 내가 바라는 상황은 윤석열 정권이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고문 가해자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지위는 비교할 수 없다. 그만큼 대통령의 언어는 합법적이고 또한 강력해서 고문 가해자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의 통치 행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설득하는 언어의 부재다. 나는 언어 부재 앞에서 열광하는 일부 시민들이 윤 대통령만큼이나 두렵다.
계엄 선포 이후 윤 대통령의 ‘점입가경(漸入佳境)’ 행위가 내게는 고문과 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호소하는 전 국민적 차원의 외우내환의 고통도 이와 같을 것이다. 고문의 시간은 기계적 시간(시계)보다 훨씬 긴 법이다. 이 ‘고문’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