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작 칼럼] 자조금이 제역할 하게 해야

2024-09-23

한국 농업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정부 주도의 농업체제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각종 보조금과 가격 지원을 통해 수급조절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쌀과 같은 주요 농산물은 공공비축제 등 다양한 가격 지지 정책을 통해 농가소득 안정망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정부는 종자 보급부터 농산물 유통까지 수많은 정책 목표를 이행하는 주체로서 농업의 끝단 모세혈관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정부의 역할을 빼고 한국 농업을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면에 선진국 농업은 대부분 시장 중심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자조금 단체를 통해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활동을 주도한다. 농민들이 만든 자조금 단체가 기업에 투자하고, 그 기업이 연구·품질관리·마케팅을 주도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게 하는 역할로 제한된다.

처음에는 우리와는 다른 농업구조의 차이가 농업정책의 차이를 만들었다. 타당한 측면도 있었다. 이제는 농업정책의 차이가 농업구조의 격차를 더 크게 벌린다. 선진국은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대규모 농장과 첨단 농업기계를 활용해 높은 생산성을 창출해낸다. 반면 한국 농업은 소규모 영세농가가 여전히 다수를 이루고 있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렵고, 농업기술 투자 대비 효율성이 낮아 기술 진보가 더딘 구조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우리도 농산물시장 개방에 대응해 생산자가 자율적으로 자조금을 마련해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1992년 임의 자조금 조직으로 양돈과 양계 자조금이 출범한 이후 30년이 넘는 오랜 역사가 있다. 현재는 품목별로 의무자조금 25개와 임의자조금 13개 등 38개의 자조금 조직이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여전히 부실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동안 873억원의 자조금이 조성됐다. 농업 총생산액의 0.2%에 못 미치고, 이 중 정부 지원금은 332억원으로 전체 자조금의 38%에 이른다.

자조금은 농축산물의 판로 확대, 품질향상, 수급조절 등을 도모한다고 관련 법에 정의돼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하기에는 예산 규모가 턱없이 빈약하다. 축산분야 의무자조금은 많게는 수백억원에 이르지만, 농산분야는 대체로 수억원, 많아야 수십억원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판촉도 벅차 품질향상과 수급조절은 언감생심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조금을 도입할 때 참고한 뉴질랜드의 자조금 제도는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80년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농업 보조금이 대폭 축소됐고, 농민들은 더이상 정부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기에 자조금을 만들고 품종개발과 기술 개선, 품질관리와 수출까지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그 위기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제스프리’가 만들어졌고, 뉴질랜드사과배협회가 성장하면서 세계 4위의 사과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현재의 농업구조에서 정부 주도의 농업체제가 바뀌는 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는 너무 강력하고 민간은 너무 빈약하다. 농업계에서는 정부의 책임성을 강조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의 농업체제가 갖는 한계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시장 중심으로 다시 농정의 축을 옮겨야 할 때이고, 자조금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농업에도 새 리더십이 필요하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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