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바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릴 법한 이 대가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체로 기량이 완숙해지는 단계에 굴지의 오케스트라를 맡는 경우가 많아 지휘자는 주로 백발 아니면 대머리라는 인식도 있다. 오케스트라 포디움(연단)은 유색인종, 여성, 청년들에게는 문턱이 높은 정도를 넘어 마치 올라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벽을 깨뜨리고 또 깨뜨려 가며 클래식에 매진해 온 사람이 있다. 오는 30일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연주하는 지휘자 로더릭 콕스(37)가 그 주인공이다.
프랑스 몽펠리에 국립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콕스는 이번 공연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미국 조지아주 출신인 그는 현재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아시아 국가를 방문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27일 서울 역삼동 GS문화재단에서 만난 콕스는 193㎝의 큰 키에 손도 아주 커 무대 위 연주자들과 객석의 관객들 모두 퍼포먼스로서의 지휘를 ‘보는 맛’도 있을 것 같았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흑인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다. 콕스는 “큰 키에 흑인인 저를 보면 사회에서는 힙합이나 팝을 좋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을 텐데, 클래식 음악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후 음악 교육을 받을 때나 악단 내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고립감을 종종 느껴왔다”며 “그럼에도 계속 클래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내면의 힘인 신념을 지켜온 것이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클래식계에서 특히나 소수자인 자신의 배경을 짐으로 생각하는 대신 “내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모범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페라의 검은 여왕’으로 불린 흑인 소프라노 제시 노먼(1945~2019)을 귀감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는 “그녀가 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나도 한계가 없겠다’ 생각했고, 음악을 한다면 국적이든 인종이든 상관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조지아주에서 가스펠 가수인 어머니 슬하에서 재즈와 블루스 소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고 자란 그는 음악교사를 꿈꾸며 콜럼버스주립대에 진학했다. 그러다 “너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한다”는 교수의 제안에 감화받아 노스웨스턴대 지휘전공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이후 시카고 신포니에타에서 펠로십 등을 하다 2016년부터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이때 사수가 서울시향 예술감독(2020~2022)을 지낸 오스모 벤스케였다. 그의 휘하에서 세 시즌을 보낸 그는 2018년 ‘게오르그 솔티 컨덕팅 어워드’를 수상하며 클래식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8년생으로 지휘계에서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그는 지난해 9월 프랑스 몽펠리에 국립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2019년 미국 미네소타주에 ‘로더릭 콕스 뮤직 이니셔티브(RCMI)’를 설립해 자신처럼 음악에 꿈이 있는 유색인종 청소년·아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RCMI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더 초롱초롱해진 콕스는 “학창시절 프렌치 호른을 연주했는데 수천달러의 악기를 살 돈이 없어 학교 악기를 빌려 썼었다”며 “나중에 뜻있는 재단으로부터 호른을 선물받은 뒤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했다. RCMI는 유색인종 청소년 음악가들을 위해 악기를 구입해주거나 교육 프로그램과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다큐멘터리 <컨덕팅 라이프>에 이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들려줄 레퍼토리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이다. 1953년 구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뒤 몇 달 만에 발표한 교향곡 10번은 베토벤, 말러 등이 넘지 못한 이른바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돌파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콕스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가 하는 연설이자 그의 삶을 담고 있는 내레이션”이라며 “작곡가가 처한 환경을 포함해 어두움과 갈등으로 가득찬 곡”이라고 했다. 1악장은 스탈린 사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 2악장은 독재자의 사라짐에 대한 인식, 3·4 악장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인생, 시련과 행복을 모두 돌아보는 작품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그는 “이 곡을 지휘할 때는 무엇보다 진지함이 필요하다”며 “어떤 바이올린 지휘자는 이런 분위기의 곡을 연주하기 전에는 침실의 빛까지 제한한다고 하는데, 나도 연주 때까지 관광이나 즐기는 활동은 최대한 제한하려고 한다”고 했다.

30일 공연은 콕스의 지휘와 서울시향의 연주에 더해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가 제작한 배경영상이 함께 상영되는 종합예술 무대다. 그래서 제목이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이다. 판지로 만든 쇼스타코비치, 스탈린, 레닌, 트로츠키 등의 얼굴이 미니어처로 등장해 움직이는 영상이 음악 연주와 함께 어우러진다. 콕스는 “음악감상에 방해될 수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면서 “대신 영상이 너무 재미있어서 지휘를 하다 거기에 빠져들까봐 걱정”이라며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