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
말콤 해리스 지음 | 이정민 옮김 | 매경출판 | 572쪽 | 2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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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미국 경제를 이끄는 첨단 정보기술(IT)의 거점이자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최대치의 부와 성공의 상징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가 뿜어내는 휘황한 빛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다.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는 그 그늘 속으로 들어가 실리콘밸리의 어두운 역사를 파헤친 책이다.
실리콘밸리의 시작은 백인 정착민의 원주민 약탈이다. 1850년 무렵 황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간 백인들은 캘리포니아 북부 올론 지역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다. 20년 뒤인 1870년 무렵의 통계에 따르면 백인 정착민의 손에 캘리포니아 원주민의 80%가 몰살됐다. 살아남은 원주민은 노예가 됐다. 실리콘밸리의 심장부로 불리는 팔로알토는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인구 재앙” 위에 세워진 도시다.
실리콘밸리의 지리적 중심이 팔로알토라면, 정신적 뿌리는 미국 최대 규모 대학인 스탠퍼드 대학교다. 사업으로 평생 쓰고도 모자랄 만큼의 자산을 모은 릴런드 스탠퍼드(1823~1893)는 일찍 죽은 아들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에게 해주지 못했던 교육을 이 지역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1891년 아들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설립했다.
스탠퍼드는 경쟁을 맹신하는 자본가였다. 1880년대 그는 자신의 세계 최대 규모의 말 농장에서 극단적인 효율주의와 성과주의를 적용했다. 스탠퍼드는 망아지가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아주 어릴 때부터 경주마로 훈련시켰다. 최대 7년 이상 걸리던 경주마의 ‘생산주기’가 2~3년으로 단축되면서 스탠퍼드는 큰 이익을 거뒀다. 훈련 중 힘줄이 끊어지는 망아지들이 생겼지만 스탠퍼드는 “2살에 실패하는 게 10살에 실패하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합리주의, 잠재력과 투기 가치에만 집중하는” 이른바 ‘팔로알토 시스템’은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진 유전자 코드와도 같다.
스탠퍼드 대학은 “불평등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문화를 창조”했다. 초대 총장이자 어류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인종주의자였다. 조던은 스탠퍼드 대학에 우생학부를 설립해 “일본은 물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이주민이 미국의 인종을 희석해 ‘인종적 소화불량’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엘우드 패터슨 커벌리를 영입했다. 커벌리의 뒤를 이어 스탠퍼드에 온 루이스 터먼은 인간의 타고난 지적 능력을 측정하는 IQ 테스트를 프랑스에서 도입한 인물이다. IQ 테스트는 천재를 찾아내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열등생을 격리하는 근거로도 활용됐다.
조던은 설립자 스탠퍼드의 아내 제인 라스롭을 살해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제인 라스롭은 1905년 2월 하와이행 선박에서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인 지 9일 만에 사망했는데, 저자는 학교 운영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한 조던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조던이 범인이라는 주장은 2021년 국내에 번역된 미국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저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설립자 아내의 죽음 이후 거리낄 게 없어진 조던은 스탠퍼드 대학교를 신기술과 산업의 중심지로 바꿔놓았다. 이후 스탠퍼드는 항공우주, 통신, 진공관,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주도하며 국가와 군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기술을 제공했다. “이곳에서 항공우주, 통신, 전자기술 부문을 구축한 도구가 발명되고 이를 통해 미국의 세계 지배 시대가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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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5대 빅테크 기업들은 성과를 위해 인간을 갈아넣는 ‘팔로알토 시스템’의 후예들이다. 애플 스마트폰의 매끈한 외양을 만들어내는 폭스콘 작업장에서는 2010년 한 해 동안 노동자 15명이 자살을 시도했다. 아마존의 물류창고와 배송창고 노동자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부족해 방광염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를 ‘민주당 좌파’이자 ‘급진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는 “실리콘밸리는 자신뿐 아니라 전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면서 실리콘밸리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스탠퍼드 대학교는 팔로알토에서 철수하고 본래 주인인 무웨크마 올론족에게 땅을 반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많은 독자분께 과도한 제안으로 들릴 것임을 이해한다”면서도 “땅을 반납하는 것만큼 실질적 해결책도 없다”고 강조한다.
1988년생인 저자는 팔로알토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실리콘밸리의 150년 역사를 500쪽 넘는 분량으로 샅샅이 헤집은 배경에는 2000년대 팔로알토에서 급증한 자살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2002년과 2003년 이 지역 학생 두 명이 각기 철로에 몸을 던졌고, 2009년에는 13~17세 학생 4명이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했다. 저자는 팔로알토와 실리콘밸리를 지배해온 극단적인 성과주의가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고 본다.
“이 모델은 승리와 패배, 무자비한 탈락을 통한 발전이며, 처음부터 전속력을 다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팔로알토 시스템이다. 이 아름다운 설계의 보상이 승자를 불러내고 승자가 패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비인격적이다. 폭력적이다. 누군가는 스탠퍼드에 갈 것이다. 누군가는 수입억 달러를 벌게 될 것이다. 팔로알토는 가능한한 빨리 이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발하기 위해 존재한다. 셸그림 남작의 말처럼 철도는 거기서부터 스스로 만들어진다. 승자조차 자신의 자녀가 철로에 서 있다고 해도 기차를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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