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결국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행복이 아닌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직간접적으로 공헌해왔다면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시민운동도 바로 이런 점에서 가치와 성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철학자이자 시민운동가인 손봉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15일 서울 강남구 밀알학교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그간 추구해 온 삶의 가치에 대해 이같이 역설했다. 그가 최근 펴낸 회고록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도 이런 그의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다. 재단법인 교육의봄을 통해 연재한 칼럼과 수필을 한데 엮어냈다. 책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유년시절,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청년시절, 귀국 후 교육자이자 시민운동가로 헌신해온 삶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
행복 추구보다 타인의 고통 줄이는 게 가치
그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은 ‘최소고통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원칙과 달리 삶에서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게 고통이라는 게 그의 논리다. 행복을 좇기보단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적은 고통을 받도록 하는 게 더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의미다. 손 교수는 스스로 일생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에는 별로 공헌하지 못했지만 지극히 조금이지만 약자의 고통을 줄이려고 애써왔다”고 자평했다.
책 표지에는 재미화가 김원숙 화백의 그림이 실렸다. 그는 “일전에 김 화백이 조롱박으로 만든 쌀되에다가 유화로 그림을 그려서 내게 선물했는데, 그 그림의 제목이 ‘산을 메고 가는 사나이’”라며 “나에게는 과분한 표현이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시민사회운동 변질…신뢰 회복하려면 정치와 연 끊어야”
책의 상당 부분은 손 교수의 시민운동가로서의 삶을 다루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의 삶에서 시민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출범을 시작으로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경실련) 창립, 1992년 공명선거시민운동협의회 결성, 1996년 밀알복지재단 설립 등 4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교육, 환경, 종교, 장애인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왔다.
손 교수는 시민운동의 의미가 정치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한국에서 시민운동이 시작된 80년대에는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다. 시민운동가들 대부분이 순수했고, 시민들의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많은 성과도 이끌어냈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성과로 토지 공개념 확산, 금융실명제 실시, 선거법 개정 등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한 점을 꼽았다.
그는 “안타깝게도 활동가들 상당수가 정치에 투신했고, 시민운동은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이미지도 추락했다. 그 뒤로는 시민운동도 정치적 이념에 따라 좌우되는 현상이 심화됐다. 과거처럼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민운동이 특정 정당에 편향성을 보인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다”며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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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사회적 개입, 윤리적 요소에 국한돼야”
“우리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는 요즘 표현을 빌리면 너무 미숙해서입니다.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는데, 온전하지도, 성숙하지도 못한 이들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다보니 확증편향이 굳어져 점점 더 미숙해지는 겁니다.”
보수 기독교계 원로이기도 한 손 교수는 계엄령 선포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를 ‘미숙함’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 원인 중 하나로는 유튜브를 지목했다. “미숙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카더라식 풍문’을 너무 믿더라. 기성 언론은 안 보고 오로지 유튜브만 신봉한다. 어른이라면 적어도 사실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기초해서 판단을 해야 하는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일부 교계 보수단체의 탄핵 반대 집회에 대해선 “정치적 극단화는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누군가를 우상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보 세력의 탄핵 찬성 시위와 다르게 보수계의 시위가 극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주화운동 당시 독재정권에 맞서 종교계가 나선 것은 민주화라는 정당성이 있었다”며 “최근 일부 보수 교계의 정치활동은 이념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교계가 사회적 문제에 개입하는 건 정치권력과 거리가 먼 윤리적 요소에 국한돼야지 이념적 요소에 개입해 정치활동을 하는 건 잘못됐다”며 교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나눔의 가치도 약자일수록 극대화”
그가 사회운동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분야는 장애인 권익이었다. ‘가장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최소화한다’는 그의 철학은 장애인 권익 운동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장애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발달장애아동 특수학교인 밀알학교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사재를 털어 밀알복지재단에 13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금은 장애인권익기금 마련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손 교수는 기부를 나눔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나눔을 실천할 때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나보다 약자다. 가령 내가 1만 원을 도우면 그 돈이 나에게 쓰이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갖는다. 결과적으로는 나눔이라는 게 내 돈의 가치를 늘리는 행위다. 때문에 가장 고통이 심한 이들을 위한 기부는 나만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나눔에 적극 나서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시민운동도 궁극적으로는 행복보다는 고통을 적게 받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교육의 목적이나 환경운동의 방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어려운 시기 나눔에 동참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