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부 팔린 韓오컬트 원조…'퇴마록' 작가 "왼쪽 시신경 죽었다"

2025-01-19

오컬트 전성시대, 원조가 돌아온다. 한국 장르 소설 최다 누적 100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소설 『퇴마록』 시리즈의 첫 극장판 3D 애니메이션이 내달 21일 개봉한다. 원작 소설도 신간이 나온다. 『퇴마록』 외전 3부가 올 4월 출간될 예정이다. 전편인 외전 2부(2014) 이후 11년 만이다.

지난 14일 만난 원작자 이우혁(60) 작가가 직접 밝힌 내용이다. 소설 집필과 더불어, 극장판 애니메이션 원작 겸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그를 서울 논현동 애니메이션 제작사 로커스 사무실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왼쪽 눈은 시신경이 죽어서 사물이 찌그러져 보여요. 나이 들며 글 쓰는 테크닉은 늘었는데 기억력은 나빠져서 (소설 집필의) 고생의 총량은 불변이죠.”

소설 집필과 맞바꾼 젊음이다. 그는 “그래도 환갑 즈음 되니 이제야 『퇴마록』을 왜 썼는지 설명할 말주변이 생겼다”며 덧붙였다. “젊을 적엔 나도 궁금했거든요.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썼지?”

사이비들 제보 전화 빗발쳤다…한국형 오컬트 원조

작가인 그도, 독자들도 32년전 『퇴마록』에 귀신 홀리듯 휘말렸다. 1993년 소설이라곤 써본 적 없는 스물여덟 공학도가 하이텔 PC통신에 “재미삼아 끄적거린”(1994년 중앙일보 인터뷰 중) 퇴마 소설이 『퇴마록』의 시작이었다. 세기말 분위기 속 판타지 열풍을 몰고 오며 국내편‧세계편‧혼세편‧말세편, 외전까지 21년간 총 21권(초판 기준)의 대작 반열에 올랐다. “학교에서 몰래 읽다 선생님한테 뺏겼다”, “퇴마록 보느라 처음 밤을 샜다”…. 애독자들의 증언이다. 책이 불티 나게 팔리면서 당시 출판사엔 퇴마를 의뢰하는 사람, 자칭 초능력‧교리를 소개하고 싶다는 사이비들의 연락도 빗발쳤다고 한다.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악령들을 퇴치하는 가톨릭 신부, 태극 기공 청년, 밀교 후계자, 신의 화신 등 퇴마사들과 신앙의 경계를 뛰어넘은 영능력까지, 한국적 오컬트 히트작의 효시였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석사 출신의 자동차 연구원이라는 이 작가 이력도 화제였다. 데뷔작 『퇴마록』에 코를 꿰여 『왜란종결자』, 『바이퍼케이션』, 『치우천왕기』, 『온-The Whole』(카카오페이지 연재 중) 등 평생 대중 소설가로 세계관을 넓혀왔다.

“『퇴마록』 판매부수가 2013년 1000만부를 넘고부턴 안 세어봤다. 그거 셀 시간에 신작을 쓰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그에게 잊지 못할 한으로 남은 작품이, 영화 ‘퇴마록’(1998)이다. 안성기‧신현준 등 당대 스타 주연의 블록버스터였지만 “제목만 갖다 붙였지 (원작과) 하나도 같은 게 없는” 영화였다. “시사회 전날까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논의 과정도 없었고, 야만의 시대였죠. 세대가 바뀌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을 보고 이해하며 자란 ‘찐팬’들과 만들었죠.”(이우혁)

"『퇴마록』, 공포 없애기 위한 소설"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스토리부터 원작 흐름에 맞췄다. 국내편 단행본 1권 첫 에피소드 ‘하늘이 불타던 날’이 토대다. 주인공 박 신부, 현암, 준후, 승희의 첫 만남을 그린다. 향후 시리즈 제작도 염두에 둔 출발이다. ‘레드슈즈’(2019)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2024) 등 애니메이션 제작사 로커스와 2019년 『퇴마록』 전편의 판권을 계약하며 이 작가가 기획‧개발부터 함께해 6년 만에 첫 결실을 맺었다.

수백 년간 은거해온 해동밀교의 교주가 악(惡)에 물들고, 밀교의 호법들이 밀교 후예 준후를 살리고자 박 신부에 도움을 청하는 내용. 무공을 위해 찾아온 현암 등도 힘을 합친다. 10대 팬층을 내다본 듯 선명한 줄거리, 퇴마 액션 볼거리가 중심이지만 원작의 본질이 담겼다고 이 작가는 평가했다.

『퇴마록』의 본질이 뭐냐고 묻자, “인간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소설”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다음은 일문일답.

-공포를 주기 위한 소설이 아니라?

“어릴 적 귀신을 네댓 번 봤다. 버스에 서서 졸 때도 가위에 눌릴 만큼, 엄청나게 겁이 많았다. 『퇴마록』을 쓸 적에도 이걸 다 정복해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실제로 지금은 꽤 극복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설로 파헤친 덕인가.

“무협이나 종교적 신화, 신적인 힘, 초능력이 다 일종의 불안 해소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존재론적 공포가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죄의식….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해소해서 대항하는 수단을 상상한 거다.”

-최근 오컬트 인기도 그런 불안 탓일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 그 자체가 다 오컬트다. 예전엔 종교의 역할이 컸는데 많이 퇴색했고 대체물이 안 나왔다. 과학만능시대라지만, 일반인의 과학 수준이 불안을 해소하는 수준까지 다다르긴 힘들다.”

-동시대 가장 큰 공포라면.

“미래에 대한 불안. IMF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해결 못한 문제가 쌓여왔다. 옛 가르침을 무시하고 해체하고 부수기만 해온 대가다. 개인이 겪는 불안과 공포는 많은데 알아서 수습하라고 하니 정신질환이 심해졌다.”

-애니메이션 ‘퇴마록’이 그런 주제를 잘 그렸다고 보나.

“인간의 정신적 문제를 타락한 악으로 좀 더 단순하게 묘사했는데, 본질이 틀린 건 아니다. 세부적인 변경은 많지만, 선을 잘 지켰다. 박 신부 캐릭터 디자인은 내 주장이 반영됐다. 그는 원작에도 185㎝ 덩치로 나온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상징이, 듬직한 이미지로 전해지길 바랐다.”

"낙태·악플…인류의 문제여서 썼죠"

-원작에선 디지털 시대 익명성, 낙태 등 시사적 소재도 다뤘다.

“인류의 문제여서 썼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대가 바뀌고 국가가 바뀌어도,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한 지속될 보편적 문제가 아니면 안 썼다. 500년 전 인간을 꿰뚫어본 윌리엄 셰익스피어(영국 문호)처럼 말이다. 세대나 성별,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퇴마사들이 가톨릭, 불교, 무속 등 서로 다른 종교의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한다.

“『퇴마록』에서 진짜 쓰고 싶은 주제였다. 서로 믿고 존중하는 것.”

-애니메이션은 영화 이후 오랜만의 영상화 작품인데.

“『퇴마록』 판권 제안이 죽었던 적은 없다. 인정 못할 작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제가 혼자 버텨왔다."

"최근 오컬트? 근원적 불안 없이 괴담 그쳐"

-천만영화 ‘파묘’(2024) 등 최근 오컬트 작품은 어떻게 봤나.

“깊이 다루지 못하고 어느 선에서 멈춘 티가 역력하다. 영화 ‘엑소시스트’(1973)는 사람이 한 명밖에 안 죽지만, 근원적 불안감, 종교 체제에 대한 이해를 건드려 엄청나게 무섭다. 그런 게 없이 오컬트를 지어내면 괴담이 돼버린다.”

-『퇴마록』이 지금껏 회자되는 비결은 뭘까.

“좀 더 파고드는 사람에겐 더 깊은 의미가 전달되게끔 썼다. 30년 지나도 살아있는 팬덤은 깊이까지 보신 분들일 거다.”

-각주만 다룬 해설집이 책 한권 분량으로 나오기도 했다.

“세계편까지 참고 서적이 2000권쯤 된다. 종로2에 있던 종로서적(1907~2002)이 책을 절대 안 버리는 서점이었던 덕택이다. 먼지 쌓인 옛날 책 더미에서 도서관에도 없는 밀교 관련 서적 등을 구했다.”

-작가로서 롤모델은?

“셰익스피어다. 『햄릿』 『맥베스』야 말로 오컬트의 정수다.”

-신작 계획은.

“예전 『퇴마록』 완결에 대해 독자들 불만이 많았다. 양자적 세계관을 생각한 건데, 당시엔 이해를 못 받았다. 올 4월엔 더 넓은 의미의 불교‧노장사상을 접목한 외전 3부가 나온다. 외전까지 『퇴마록』 1기를 마무리하고, 『퇴마록』 2기 집필도 준비 중이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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