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5) 우금치 전투 이후 지방통제의 실상을 보여준 북하면보

2025-02-26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북하면보(北下面報)〉는 총 12건으로 현재 모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북하면장 홍순철은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하면의 상황을 상부인 청양현에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정정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동안 북하면이 충청도 예산에 속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하면은 충청도 청양현에 속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있으며, 〈호구총수(戶口總數)〉(1798)에서도 역시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청양현 북하면과 북상면이 운곡면으로 합쳐졌다. 1894년 당시 북하면은 현재 운곡면 영양리, 미양리, 광암리, 추광리 및 신대리 일부 지역이다. 이는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하면보〉가 12건이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외의〈북하면보〉가 더 있다고 짐작된다. 이 〈북하면보〉의 작성자 또는 보고자는 북하면의 면장 홍순철이었고, 수급자는 청양현이다.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작성 시점이다. 이 〈북하면보〉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작성되었다. 가장 빠르게 작성된 것은 바로 11월 10일(음력)에 작성된 〈북하면보〉이다. 이 시기는 바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한 직후이다. 즉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 하자마자 행정단위의 기본조직인 면의 책임자가 고을 현감에게 해당 면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는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 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청양현 북하면은 공주 우금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히 보고가 빈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12건의 〈북하면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하면보〉 현황

<북하면장 홍순철이 작성한 보고(1894년 11월 15일)>

북하면의 첩보[北下面報]

다음과 같이 면(面)에서 첩보합니다. 그간 찾아서 얻은 병기는, 길이 1장 5척인 장창(長鎗) 1개로, 위아래가 구리로 장식되어 있고 고리를 잇닿아 꿴 사슬이 달려 있어 쟁쟁하게 울리니 창 가운데 특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環刀) 한 자루, 등자(鐙子)가 없는 말안장 1건입니다. 지금 이에 관아에 납부하기 위해 이날 보냅니다.

추동(秋洞)에 거주하는 최원재(崔元在)는 바로 동도(東徒)들의 수괴로 이른바 ‘대정(大正)’의 직임을 맡은 자입니다. 일전에 대흥(大興) 백성들에게 잡혀갔는데, 무슨 교묘한 언변으로 별난 농간을 부렸는지 처벌을 피하고 나와 끝내 징계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동에 사는 백성들을 위협하여 장차 재앙의 그물 가운데에 묶어 던져 버리려고 하여 추동의 백성들이 장차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잡아와서 자백하게 하니 스스로 말하기를, “10여 년간 동학 수백 명에게 포덕(布德)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삼은 것을 캐 보니,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고 다른 사람의 집을 훼손시키며 다른 사람을 묶어 놓고 돈을 바치게 하는 등의 일에 매번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밟아 죽이네, 불을 지르네 하는 말로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동(洞)의 민가(民家)에 감시하에 잡아 두고서 관아에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미시(未時)쯤에, 공주(公州) 신촌(新村)의 백성들이 배대일(裵大一)을 마을 안에 잡아 두고 사람을 시켜 급히 기별하기에 면의 백성을 보내 데려와서 또 동의 민가에 묶어 두고 또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첩보합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11월 15일 묘시(卯時)

북하면장 홍순철(洪淳喆)

[제사]

보고한 것 중에 창 한 자루는 잘 도착했는데, 환도, 말안장 그리고 수동(受洞)에서 옮겨 온 화포(火砲) 한 자루는 무슨 이유로 오지 않는 것인가?

동도(東徒)들이 혹여 오면 즉시 첩보한 대로 조사하여 찾아내 들여보내라. 그리고 최원재와 배대일에 관한 건은, 착실한 군인을 따로 정해서 모조리 속히 압송하고, 여러 가지 사무들은 모두 이전의 영칙(令飭)의 내용대로 별도로 자세히 살펴서 실행하되, 촌마을 사람들과 반드시 의지하면서 안정되기를 힘쓰도록 할 것.

15일

관(官) (서압)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11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81∼82쪽)

위의 내용은 1894년 11월 15일 묘시(오전5시∼7시)에 북하면장 홍순철이 청양현감에 보고한 내용이다. 주요 내용은 북하면에서 수거한 병기인 장창 1개, 환도 1자루, 말안장 1건을 청양현에 보낸다는 것과 추동에 거주한 동도 수괴 대정 최원재와 배대일을 잡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즉 북하면 차원에서 과거 동학에 참여했던 수괴 최원재와 배대일을 임의로 잡아 그 잘못을 따지고 있다. 당시 면 조직 차원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일을 자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를 받은 청양현은 제사(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한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에 대하여 관부에서 써주는 처분)를 통해 병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최원재와 배대일을 압송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청양현이 북하면에서 자발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중요한 내용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그 재산을 몰수하고 있다. 1894년 12월 15일 〈북하면보〉에 따르면 “동적(東賊)의 물건은 관아에서 몰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북하면보〉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상황에 대한 보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회군의 활동, 북하면의 동학농민군 토벌 활동,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사용한 현황 등이 〈북하면보〉의 주요 내용이다. 당시 동학농민군 토벌과 진압활동이 지방행정조직을 통해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지방행정조직이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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