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면 각양각색의 섬네일(thumbnail)이 시선을 끌며 클릭을 유도한다. 막상 섬네일을 클릭하면 기대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면 가짜뉴스(fake news)나 거짓 내용으로 클릭 장사한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속이는 사람도 속임 당하는 사람도 익숙해져 별다른 느낌도 없다. 이미 가짜나 거짓에 대한 불감증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異民族)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이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매스컴에서는 가짜뉴스가 판치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미디어(media)가 오만불손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반국가적 세력으로 몰려 오히려 매도당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국민은 언론도 정부 당국도 신뢰(trust)하지 않는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데,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치려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클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不信風潮)가 난무한 작금을 살아가야 하기에 현대인이 갖춰야 하는 주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정직’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정직에 대한 교육부터가 문제투성이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그럴듯하게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아이를 오히려 똑똑하다고 칭찬하는 어처구니없는 비교육적인 행태가 팽배해 있어 안타깝다.
거짓말에는 선의의 거짓말과 악의의 거짓말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 가운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3대 거짓말이 있다. ‘장사꾼들이 밑지고 판다는 말’, ‘처녀가 시집 안 간다고 하는 말’, 그리고 ‘노인들이 늙으면 죽어야지’가 그것이다. 이런 선의의 거짓말은 남에게 해(害)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국정을 운영하고 이 나라 온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고위공직자들이 거짓말을 일삼는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일수록 거짓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권력자의 거짓말은 자신은 물론이고 나라를 위기로 빠뜨릴 수 있기에 악의의 거짓말은 반드시 삼가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거짓말할 거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어디서든 거짓말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용서를 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거짓말이 들통나도 사과하지 않는다. 더욱이 거짓말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것도 나이가 들수록, 사회경제적 지위(SES)가 높을수록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탄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풍토가 만연되면 자연스럽게 병든 사회(sicked society)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할 때 정직하라고 언급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죄악임을 느낌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악의의 거짓말이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될지라도 윤리 도덕적으로 비난의 뭇매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이라고 했거늘. 즉, ‘선한 자는 말이 없고, 말이 많은 자는 선하지 않다’를 필자는 감히 말씀할 ‘변(辯)’을 변명할 ‘변(辨)’으로 변환하여 ‘善者不辨 辨者不善’으로 문장을 바꾸어 해석해 본다. 즉, ‘선한 자는 변명하지 않고, 변명하는 자는 선하지 않다’라고. 여기에 덧붙여 거짓말이 일상이 된 우리 사회를 향해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라고 새삼스럽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경(心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