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작곡가 말러(사진)는 이방인의 예리한 시선으로 황홀경과 고통이 공존하는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때론 추하고, 때론 조화로운 미에서 멀어진다. 그게 더 진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는 보헤미안·오스트리아인·유대인, 비주류 세 가지가 겹친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되었지만, 세상이 그에게 내보이는 적개심은 가실 줄 몰랐다.
세기가 바뀌고 마흔 즈음이 되었을 때, 말러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해도 외로웠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였다. 만일 지상에서의 불완전한 사랑이 영원한 천상의 삶에 대한 예표라면, 사랑과 죽음이 꼭 서로 모순되는 일은 아니다. 사랑과 죽음, 순간과 영원이 그의 마음 중심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불안은 여전했고, 그는 이제 더 깊은 사변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쯤 한 편의 노래가 탄생했다.

‘나는 세상에서 잊혔네/ 더불어 덧없이 오랜 시간 쇠했네/ 세상은 오래도록 내 소식 못 들어/ 그저 내가 죽었겠거니 하겠네// 그것도 내겐 별 상관없는 일./ 죽었다 여기든지 아니라 하든지/ 나 역시 반박할 아무 것 없으니/ 세상 보기에 나는 죽은 것이나 같네// 요지경 세상에게는 죽은 자요/ 고요한 땅에서 쉬고 있으니/ 나의 하늘 그 속에서 나 홀로 살리,/ 나의 사랑, 내 노래 속에서!’
뤼케르트의 시에 붙인 이 노래(‘뤼케르트에 의한 5개의 가곡’)는 말러의 가장 진실된 고백이다. 거의 도교적이라 할 만큼 관조적인 분위기, 흡사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커지려는 마음 없이 고요히 세상을 뜨려는 은자의 음성과도 같다. 한 사람의 외로움이 예술작품으로 바뀌어 시간 너머로 공명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외로움에도 귀를 열라는 호소다. 세상에 잊힌 자들에게 다시 손을 내밀라는 요청이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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