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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협곡을 지나 햇살이 비치니 절벽에 새겨진 미지의 신전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모험영화의 고전,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 등장한 요르단의 페트라 유적이다. 한때 3만 인구의 대도시로 번성했던 페트라는 363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잊혔다 19세기에 재발견된다. 당시의 문인들은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도시여”라 찬탄했다.
광야의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기원전 4세기부터 정착해 건설한 페트라는 내륙 무역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남북으로 시리아와 예멘을, 동서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향신료의 길’ 교차점에 자리했다. 험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이고 1㎞ 길이의 협곡 ‘시크’를 통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천혜의 요새였다. 반건조 기후의 겨울 홍수를 저장한 동굴 저수조와 절벽을 뚫어 연결한 수로망으로 풍부한 물을 공급한 고대의 혁신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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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에 걸쳐 산재한 600여 유적들은 대부분 붉은 사암벽을 굴착한 동굴로 무덤·신전·수도원들로 추정된다. 지상 도시는 계속 발굴 중인데 대형 사원, 시장, 심지어 정원과 연못까지 속속 발견되어 아직 대부분 땅에 묻힌 미지의 공간이다. 동굴은 사막 유목민의 안정적인 거처이자 영원한 무덤이었다. 나바테아인들은 동굴 표면에 고전 건축의 외관을 조각해 예술적 수준으로 승화시켰다. 가장 유명한 카즈네(보물창고·사진)는 코린트양식의 신전 위에 원통 톨로스(원뿔 모양 지붕)를 가진 절단 박공건물로 2층을 만들었다.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이외에도 수도원인 다이르와 왕릉 등 무수한 헬레니즘의 건축들이 널려있다.
바위라는 뜻의 페트라는 8500명 규모의 원형극장, 터널 집회소 등 대형 시설도 암벽을 가공해 마련했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와 동굴에 익숙한 고유한 전통에 무역을 통해 수용한 헬레니즘 문화를 융합했다. 사막 한가운데 국제적인 도시 문명을 꽃피운 그들은 “부당하게 잊힌 고대 민족”이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