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점점 거리를 두는 사춘기 아이에게도 갈수록 가까워지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친구입니다. 엄마·아빠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어도, 친구 말이라면 철썩같이 따릅니다. 말 그대로 친구가 아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셈이죠. 양육자 입장에서는 그런 자녀의 모습이 못미덥고 걱정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춘기 아들 두 명을 키우는 이은경 작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친구에게 매달리는 진짜 이유를 알고 난 뒤, 비로소 아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됐죠. 친구 따라가는 아이에게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 작가의 칼럼 ‘옆방에 사춘기가 입주했습니다’ 7회에서 그 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밖에’병이 재발했습니다
냄새로 시작해 쓰나미 같은 잠을 몰고 왔던 사춘기는 머지않아 또 다른 새로운 증상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갔다 올게’병.
아이는 틈만 나면 현관문을 열고 나갈 생각뿐이었다. 낮잠이나 밤잠을 자고는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외출했다. 잠깐 들어왔나 싶으면 또다시 사라졌다. 집이 없어 동네를 떠도는 아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외출의 이유는 때마다 찬란했다. 농구를 해야 하고, 영화를 봐야 하고, 조별 과제를 해야 하고, 축제 준비를 해야 하고, 야구장에 가야 하고, 노래방에 가야 한단다.
아이가 ‘가야 한다’ ‘애들 다 간다’라고 말할 때마다 좀 어이가 없었다. 가야 하는 게 아니라 실은 가고 싶은 거니까. 아이는 툭하면 나가지 못해 동동거렸고, 누가 문 밖에서 기다리기라도 하듯 들뜬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 뒤통수가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오래되긴 했으나 돌 지났을 무렵, 아이는 지금과 비슷한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갈 생각, 밖에 나갈 상황도, 분위기도 아니지만 결국 나가야 끝이 나는 몹쓸 병 말이다.
당시 병명은 ‘밖에’병. 아이는 신발을 들고 와 찡찡거리며 밖에 나가자고 애걸복걸했다. 지난 밤 잠을 설쳤더라도, 동생이 아직 어릴 지라도 결국 아이 손 잡고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병이었다. 완치된 줄 알았던 그 병이 사춘기가 되어 뒤늦게 재발한 것이다.
물론, 그때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 아이는 혼자다. 혼자 나간다. 아니, 혼자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그때 푸석한 꼴로 믹스 커피를 부어 마시던 어머니가 사춘기 아이와 함께 나가고픈 마음에 머리를 감고, 화장도 하고, 제 아무리 말끔하게 차려 입어도 소용없다. 혹여 엄마가 따라 나올까 아이 동작은 더더욱 빨라질 뿐이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어디 가는 거냐고, 누구랑 노는 거냐고, 몇 시쯤 들어올 건지, 저녁을 어떻게 할 건지 묻는 엄마에게 매일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한 채 황급히 집을 떠난다.
“모른다고! 가봐야 안다고!”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아이는 실상 정말 모른다.
애들 몇이 만나서 놀기로 했다 길래 시간과 장소만 대충 전해 듣고 일단 출발했을 테니까. 예상과 다른 아이들이 나와 있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동네까지 가서 농구공을 던지거나 ‘인생 네컷’을 찍게 될 수도 있고, 저녁까지 먹었음에도 이대로 헤어지기엔 어딘가 성이 차질 않을 수도 있으며 오늘따라 어쩐지 적당히 놀다 좀 이르게 귀가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게 사춘기 아이들의 만남이자 어울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