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장 뛰는 치즈·초장·조개의 조합
식당서 먹을 때마다 감질나던 양
캠핑장서 50개나 구워 먹으니
마음이 치유된 느낌
가끔은 균형을 깨고
기울어진 행복 맛보는 것도 필요
포레스트 검프는 말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고. 그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어딘가 한 부분이 결코 철들지 않는 나는 항상 반항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필 초콜릿만 가득한 상자를 갖고 싶은데, 하고.
편의점 대신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가득했던 시절에는 가게마다 다른 구성으로 판매하는 ‘과자 종합선물세트’가 있었다. 그냥 평범한 종이상자에 포장지를 둘렀을 뿐이지만 그때는 함부로 갖고 싶다고 바라서도 안 될 것 같아서 사달라고 조르지도 못했다. 하루에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과자를 상자 가득 가질 수 있다니? 가끔 집에 놀러 온 손님이 이 종합선물세트를 주면 한동안은 과자 축제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이름을 아는 과자도 많지 않아서 상자 안에 든 과자가 모두 신기하고 기뻤지만, 지금 생각하면 인기 있고 유명한 과자들 아래로 재고로 남았을 법한 심심하고 재미없는 과자도 많았다. 좋아하는 과자를 먼저 냉큼 먹어 치우고 나면 한동안 부모님으로부터 타박을 들었다. “그 상자 안에 든 과자 다 먹지 않으면 새 과자는 사 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과자니까 불평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꾸역꾸역 의무감으로 한두 개씩 먹어 치우려고 노력했다.
이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냉동실 가득 구슬 아이스크림만 있다면?’ ‘콩밥 없이 살 수 있다면?’ 하지만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고 두루두루 고르게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우는 학생 시절에는 그런 요구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것만 집어먹는다니!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한다니!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청춘이구먼, 싶으면서 그래도 성장기에는 무엇이든 다 도전해보고 싫은 것도 할 줄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에 대한 배신이라고 느껴질까? 하지만 원래 작용이 크면 반작용도 크기 마련이다. 어릴 적에 자제를 좀 해봐야 어른이 되고 나서 먹고 싶은 것만 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할 때 훨씬 짜릿하다고! 물론 이제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니까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알아서 채소도 챙겨 먹고 운동도 하게 되지만, 억압을 좀 당해봐야 이제 내 맘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해방감이 찾아오니까.
가리비 치즈구이 50개 구운 날
그날이었다. 내가 초콜릿 상자를 직접 채워보기로 결심한 날은… 지난 캠핑을 준비하러 마트에 갔을 때 가리비를 50개 샀다. 항상 낙엽처럼 예쁜 컬러라고 생각되는 홍가리비였다. 오랜만에 재개한 이번 봄 캠핑에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생각하는 순간부터 조개구이! 조개구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개는 먹을 수 있는 부분에 비해 부피가 커서 특히 어떻게 조리해도 푸짐해 보인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조개구이집의 직화구이 뷔페와 같은 분위기를 아주 좋아한다. 이것저것 종류도 잘 구분하기 힘든 조개를 불 위에 좌르륵 올리면 어느 순간 순서대로 입을 딱딱 벌리고, 절대 한 방울도 흘리고 싶지 않은 조개즙과 살점이 드러난다. 쓱쓱 잘라서 이것저것 주어진 양념에 찍어 먹으면 이쪽은 조금 달달하고 저쪽은 조금 쫄깃하다 등을 비교하면서 본인의 조개 취향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 내 취향은 초장 치즈구이였다.
솔직히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난 조개 본연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초장에 모차렐라 치즈라는 자극적이고 키치한 재료를 얹은 키조개구이만 보면 심장이 뛰는 것이다. 처음에는 왕 크니까 왕 맛있어서 왕 좋은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몇번 조개구이를 직접 해보고 깨달았다. 이것은 관자가 손바닥만큼 커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초장과 치즈의 조합이 스트레이트하게 심장에 와서 바로 꽂히는 즉각적인 도파민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삶은 브로콜리도 초장에 찍으면 먹기 쉬운데, 조개 치즈구이 앞에서 내가 저항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개구이집에서 조개 치즈구이만 배터지게 먹기는 쉽지 않다. 보통 세트 구성의 일부를 이루니까 각종 조개를 먼저 먹다 거대한 키조개가 익어서 관자를 쓱쓱 잘라 초장과 치즈에 버무리면 이때다 하면서 먹는 정도다. 횟집에 가서 따로 판매하지도 않는 콘치즈가 너무 맛있어 아끼면서 먹는 것과 비슷하다. 콘치즈만 프라이팬 가득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면 집에서 내가 해 먹으면 된다. 자그마한 관자에 아삭아삭한 다진 채소와 익으면 쭉쭉 늘어나는 치즈를 넣고 초장을 아주 살짝 버무린 바로 그 치즈구이만 배터지게 먹고 싶으면? 그것도 내가 만들면 되는 것이다. 캠핑 만세.

해산물은 비리고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집에서 요리하기 부담스러운 재료인데, 캠핑에서는 호쾌하게 씻어서 착착 굽고 싹 쓸어서 정리할 수 있어 조금 더 손이 쉽게 간다. 가리비는 뻘에 살지 않아서 해감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 손질하기가 어렵지도 않다. 그저 입을 꽉 다문 것만 골라서 칼을 밀어 넣어 껍데기 두 장이 서로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관자가 한쪽 껍데기에서 떨어져 나오도록 도려내기만 하면 된다.
마치 이미 접시에 담긴 것처럼 한쪽 껍데기에 조갯살이 얹혀 있도록 손질하고 나면 다진 파프리카와 다진 마늘을 넣는다. 파프리카도 조화로운 맛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색색으로 곱게 다져 넣는 것이 좋다. 고급일 필요도 없는 모차렐라 치즈를 올리고 초장을 조금씩 얹는다. 조개 자체에 약간의 짠맛이 있으니까 초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짜다. 우리는 50개씩 먹을 것이기 때문에 짠맛은 조금 조절하는 것이 좋다.

석쇠를 직화에 얹고 조개를 나란히 올리면 곧 조개즙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그 열에 날로 먹어도 무방한 파프리카와 마늘이 살짝 익고, 치즈가 녹아서 조개즙, 초장과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조금 더 기다리면 마치 오븐에 구운 것처럼 윗면이 노릇해지기도 한다. 그릇에 잔뜩 담아서 가리비 하나를 먹어 치우고, 곧 그다음 가리비를 손에 든다. 옆에는 빈 조개껍데기가 산처럼 쌓인다. 정신없이 조개 치즈구이를 해치우고 나니 진심 1년치는 먹었으니 당분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조개구이, 아니 콕 찍어 조개 치즈구이에 대한 갈망이 싹 쓸려 내려가는 일종의 치유 효과? 내일부터는 다시 건강하고 평범한 식사로 돌아가도 당분간 이상하게 억울한 기분이 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렌지 초콜릿으로만 가득 채운 상자, 치즈구이로만 메운 조개구이 석쇠. 포레스트 검프의 말처럼 인생이 초콜릿 상자라면 가끔은 내가 그 상자를 벌컥 열고 직접 채워봐도 좋을 일이다. 어차피 살다 보면 씁쓸한 맛을 보는 날이 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가끔은 균형을 깨고 기울어진 행복을 맛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균형을 찾아갈 힘이 생길 테니까.
▶가리비 초장 치즈구이
재료
가리비 50개, 다진 빨강·노랑 파프리카 1/3개씩, 다진 마늘 5쪽 분량, 다진 모차렐라 치즈 한 줌, 초고추장 적당량
만드는 법
1. 가리비는 깨끗이 씻은 다음 입을 다물지 않은 것은 버린다. 위아래 껍데기 사이로 칼을 밀어 넣고 한쪽을 도려내 껍데기 한쪽을 제거한다.
2. 껍데기에 다진 파프리카와 마늘, 치즈를 얹는다.
3. 초고추장을 약간 뿌린다.
4. 직화나 그릴에 얹어 조개즙이 보글보글 끓어서 치즈가 녹고 초장과 어우러지도록 구워 먹는다.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