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행복한가

2024-09-26

우리들은 누구나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은 찾아올 것이라고 막연히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잘못된 생각이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언가 아름다운 것, 혹은 유용한 것을 창조해냈을 때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을 때 따라오는 간접적인 감정이다.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불행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행복과 돈을 동의어로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단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나면 인간의 행복은 수입의 많고 적음의 범주를 떠난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사랑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행복을 결정한다.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의 미래가 낙관적일 때, 우리의 능력이 향상되고, 다른 이들의 능력 향상을 도왔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다시 말해,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 때 가장 행복하게 느낀다.

스토아학파는 행복이 물질적 부나 지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덕과 지혜로부터 온다고 역설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당부했다. 매일 밤잠자리에 들기 전, 조금의 시간을 내어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나?”, “내가 오늘 잘못한 일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다하지 못한 책임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에만 급급하다면, 우리는 결국 깊이 없고, 탐욕스럽고, 기만당하기 쉽고, 바보스러운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행복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다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삶이란 어차피 즐거움과 슬픔의 기둥들 사이를 걷는 여행이다. 웃음과 사랑은 그 여정의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고통과 슬픔도 역시 그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비극적 측면을 외면하려 한다면 인간이기에 겪어야 하는 커다란 생의 일부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우리를 혼을 깨우고 양심을 자극하기 위해 힘을 쓴다. 그들은 우리에게 생의 좀 더 어두운 부분을 상기시킨다.

역사적으로 천재들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 작곡가인 로시니와 말러, 정치가인 링컨과 처칠, 화가인 미켈란젤로와 고갱,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와 키에르케고르가 그 예이다. 물론 모든 천재들이 우울증을 앓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우울증 환자들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적 피폐를 미화하고 싶진 않다. 그것은 명백히 사람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밤이 없이는 새벽도 오지 않듯이,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시기는 삶 속에서 자연스럽고 소중하기까지 한 기회이다. 그런 기회들이 없다면 우리가 ‘생의 최고의 순간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누릴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일매일 아주 바쁘게 보내고 있고, 스스로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끊임없이 “얼마나 더 가져야 내가 행복해질까?”를 묻는 대신 “내가 어디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내 욕심과 타인을 위한 배려와의 균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그리고 “행복 때문에 잊어버린 다른 중요한 건 없을까?”라고 질문해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길 원하다. 하지만 인생은 공부, 일, 용기, 명예, 감정이입, 그리고 고난을 통해 강해지는 과정을 경험하기 위한 훈련장이기도 하다.

진정한 만족은, 행복은 우리의 삶이 무언가 의미가 있고 위대한 것에 녹아들어가 가치 있게 사용되고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를 감사로 이끈다.

서정환 신아출판사 회장

저작권자 © 전북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