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거리를 지킬수록 가까워진다

2024-09-25

이원후 심리상담사/논설위원

관계로 어려움을 겪는 남성이 상담실을 찾아왔다. 그동안의 인생사를 털어놓으며 생이별과 사별, 영문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연을 마주한 경험,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는 경험들을 이야기하였다.

‘나의 문제인 거야? 아니면 세상이 문제인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거 아니겠어?’ 마치 내가 융통성 없다는 듯이 툭 내뱉는다.

호감 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따뜻한 봄 햇살과도 같이 자신의 분수를 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넘지 않으며 안전거리를 지킬 줄 안다는 의미다. 2천여 년 전에 공자가 말한 ‘급하면 일을 망친다’와 ‘과유불급’이 바로 분수를 아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필요한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고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화낼 일도 없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기를 기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낸다. 바람결에 던진 먼지가 자신에게 돌아오듯 불행은 불행을 저지른 이에게 돌아온다.

여러분은 혹시 잘못을 저지른 주변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주고 거듭되는 잘못에도 용서해 주는가? 항상 선량하게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다보면 타인이 당신을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누군가는 관용이란 가시덤불 속에 핀 들꽃과 같아서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방임과 다름없다. 방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시덤불이 아무렇게나 자라게 하여 일의 본질을 망가트린다. 우리는 관용과 방임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엄격하지만 아량이 있으며 관대하지만 격식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관용은 무엇일까? 셰익스피어는 관용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가랑비와 같다고 했다. 그것은 관용을 베푸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고 관용을 받는 사람에게도 복을 준다. 무서운 것은 관용과 방임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이다. 잣대와 경계를 잃어버리면 서서히 방종하게 된다.

그렇게 관용이 방임으로 바뀌면 셰익스피어가 말했던 부드러운 비는 홍수로 변한다. 원칙이 없고 경계가 없는 관용은 곧 방임이다. 이것은 결국 상대방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악화시킨다. 만약 정말로 상대방을 생각한다면 ‘사랑은 엄한 것이고 경계 없는 관용은 해롭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관용에 적절한 분수를 설정하고 넘치는 동정심에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결혼, 대인관계 혹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저 잘못을 방임하다 보면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관용과 방임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으면 시시비비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잘못된 행동에 부채질해 타인에게 해만 끼치게 된다. 결국 서로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대인관계에서의 보호막이 된다. 너무 가까워져 사생활이 없어지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적절한 거리가 아름다움을 만든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만물의 소생을 조화롭게 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 원활하고 긍정적인 감정의 흐름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