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집고 믿음을 부식시키는 독한 이론

2025-03-27

외계인과 지적 대결할 사상가라는

데닛의 저서 30년 만에 국내 번역

다윈의 아이디어를 망치로 삼아

인본주의의 전제들 철저히 파괴

인간의 마음도 “생성된 인공물”

인공지능의 선구자로 알려진 MIT 인공지능학자 마빈 민스키는 철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인 대니얼 C 데닛(1942~2024)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구를 대표하여 외계인과 지적 대결을 펼쳐야 할 사상가를 선발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데닛을 선택할 것이다.”

다윈의 위험한 생각

대니얼 C. 데닛 지음 | 신광복 옮김

바다출판사 | 951쪽 | 6만5000원

데닛의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 출간된 지 3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됐다. 데닛은 약 60년간 저서 20여권과 논문 수백편을 썼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힌다. 과학철학자인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는 “외계인이 그의 저서들을 찾아보려 할 때 지구인을 위해 숨겨야 할 한 권의 책”이라고 평가했다.

책에서 데닛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찰스 다윈의 아이디어를 망치로 삼아 철학, 사상, 윤리, 언어, 도덕 등 인간중심주의·인본주의를 떠받쳐온 기둥들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데닛은 다윈의 진화론을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만능산’에 비유한다. “다윈의 아이디어는 모든 전통적인 개념들을 부식시킬 뿐 아니라, 그 먹어치운 자리에 혁명을 겪은 새로운 세계관을 남겨 놓는다.” 다윈 이론이라는 만능산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념의 바위에는 구멍이 뚫린다. 데닛은 제아무리 다윈을 부정하고 저주해도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본다. 제목에 ‘위험한’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그래서다.

책에서 데닛은 방대한 지식의 영토를 가로지르며 진화론 이전의 세계관을 전복한다. 데닛이 다윈 이론으로부터 끌어오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두 가지다. “종이 분화되는 과정은 알고리즘”이라는 것과 “자연 선택 과정은 알고리즘이긴 하지만 무목적적이고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다윈 이전의 철학자들은 생각하지 않는 물질로부터 의식 있는 존재가 탄생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윈 이론의 궁극적 함의는 생명이란 신과 같은 지적인 존재의 설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시적 생명체가 오랜 시간 알고리즘적 과정을 거쳐 진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조건을 만족하면 값을 산출할 뿐, ‘목적’이나 ‘의도’와는 관계가 없는 절차다. 컴퓨터가 알고리즘을 이용해 복잡한 계산을 하거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책에서는 이를 “무마음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우연을 입력값으로 하는 알고리즘적 과정들의 연쇄에 불과한 것이 그런 찬란한 것(자연 세계의 경이로운 생명)을 정말로 출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 연쇄는 누가 설계했을까?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 연쇄 자체도 맹목적인 알고리즘적 과정의 산물이다.” 이 같은 생명관은 창조자로서 신의 개념을 폐기한다. 데닛이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대표적인 ‘무신론의 수호자’로 불리는 이유다.

데닛은 언어, 예술, 윤리, 과학, 종교 등 인간의 문화에 대한 통념도 전복시킨다. 전통적인 인문주의자들에 따르면 문명을 만든 것은 인간의 마음이고, 그 마음은 1.4㎏짜리 뉴런 덩어리로 환원되지 않는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다. 그러나 데닛에 따르면 인간의 문화는 도킨스가 ‘밈’이라고 부르는 ‘문화 유전자’가 끊임없이 복제되고 확산된 것일 뿐이다. “협동, 음악, 글쓰기, 달력, 교육, 환경 의식, 군비 축소”부터 “반유대주의, 비행기 납치, 스프레이 낙서, 컴퓨터 바이러스”까지 광범위한 인간의 활동이 밈에 해당한다. 데닛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밈이 자신을 퍼뜨리기 위해 올라타는 ‘탈것’이다.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밈이 인간의 뇌를 자신들에게 더 좋은 서식지로 만들기 위해 재구성하여 생성된 인공물이다.”

데닛의 논의를 따라가면 인간의 자율성은 ‘착각’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이 된다. “내가 내 몸과 그것을 감염시킨 밈들 사이의 어떤 복잡한 상호작용 시스템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니라면, 개인적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내 배의 선장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내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지며 내 승리에 대한 명예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자유의지로 내가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율성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신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에게 자율성도 없다면 윤리와 도덕의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데닛은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라는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윤리적 의사결정에서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공식이나 알고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거의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절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계하고 재설계할 마음 도구들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 우리가 생성한 문제들에 대한 더 나은 해결책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

데닛이 이후에 쓴 주요 저서들은 물론이고 다윈 이론의 세례를 받은 다른 국내외 학자들의 책도 상당수 국내에 소개된 터라, 이 책에 실린 데닛의 아이디어가 대단히 충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내에 번역된 데닛의 저서들 중 가장 방대한 분량(951쪽)을 자랑하는 만큼, 그의 집요한 ‘우상파괴’ 작업을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판에는 데닛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면 인쇄 오류라고 오인할 낯선 표현들이 나온다. ‘없작다’(Vanishingly small)는 확률이 없을 만큼 작다는 뜻이고, ‘천많다’(Very-much-more-than-astronomically)는 천문학적 개수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다. 사전에는 없는 표현들이다. 한국어판을 출간한 바다출판사 관계자는 “적합한 번역어가 없어 번역자가 만들어낸 단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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