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 프랑스는 옛 식민지였던 말리에 군사를 보냈다. 이 지역에서 암약 중인 이슬람 테러리스트 진압을 목표로 한 군사 작전은 이듬해 인근의 모리타니와 부르키나파소 등으로 확대돼 9년 넘게 계속됐다. 5000명이 넘는 군인을 파병했던 작전에서 프랑스는 눈과 귀가 되는 정보 수집이 어려워 미국의 정찰기에 의존했고 전투기도 미국 공중 급유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영국과 함께 핵무기 보유국인 프랑스 전력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트럼프 압박에 나토 존립 흔들
EU, 8000억 유로 재무장 계획
독일, 헌법 수정해 국방비 증액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유럽 안보는 유럽이 맡으라고 요구해왔다. 창설된 지 76년간 유럽의 안보를 지켜왔던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존립 기반이 흔들린다. 유럽은 저성장의 와중에 미국이 없는 자주국방을 대비해야 한다. 중복 지출을 최소화하고 첨단무기를 공동개발해 함께 운용하는 유럽 차원의 공동 안보가 해답이다.
EU 자주국방에 병력 30만 명 증원 필요
현재 유럽에 주둔 중인 미군은 약 10만 명 정도다. 나토의 작전 계획에 따르면 유럽의 한 회원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군 20만 명이 증파된다. 따라서 자주국방을 하려면 유럽 회원국이 30만 병력을 증원해야 한다. 당연히 방공망도 강화하고 첨단 무기를 개발·구입해야 하는 만큼 국방비의 대폭 증액이 필요하다. 브뤼셀 소재 브뤼겔연구소는 지난 2월 말 보고서에서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8%인 국방비를 거의 두 배인 3.5%로 올려야 한다고 추정했다. NATO 회원국은 GDP의 2% 국방비 지출을 공약했다.

유럽의 재무장 계획은 지난 6일 열린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제시돼 어느 정도 합의됐다. 앞으로 5년간 8000억 유로(약 1200조원)의 자금을 EU가 마련해 유럽 차원의 안보 강화에 지출할 예정이다. 이 중 1500억 유로는 단일 유로채권(Euro bond)을 발행해 조달한다. 나머지 6500억 유로는 EU 예산 중 회원국의 낙후 지역에 지원하는 결속기금을 일부 전용하고, 자본시장을 확대해 민간 기업의 투자도 유도한다.
단일 유로채권으로 마련하는 기금은 회원국에 지원하는데 주로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미사일과 대포·탄약 및 드론 등의 공동구매에 쓰인다. 단일 유로채권은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집행위원회가 국제 자금 시장에서 장기채권을 발행한다. 우량 신용등급을 바탕으로 보통 만기 20년이 넘는 채권을 발행하는 만큼 회원국도 장기 분할 상환에 따른 부담이 적다. 2020년 코로나19 때 처음 발행됐고 이번이 두 번째가 된다. 단일 채권 발행은 EU의 재정 통합을 촉진한다.
EU의 지원과 함께 회원국의 국방비 증액도 필요한데, 족쇄가 되는 안정성장조약의 예외를 허용하기로 했다. 즉 유로화를 채택한 20개 EU 회원국은 재정 적자가 GDP의 3%를 넘어서는 안 되지만 국방비 증액의 경우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
건전재정 족쇄 풀어 국방비 2배 늘려
유럽정상회담 이틀 전 독일은 1조 유로에 가까운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절반은 국방비 증액이다. EU 최대의 경제 대국인 독일은 2016년부터 기본법(헌법)에 균형재정조항을 명시해 준수해왔다. 연방정부의 순부채가 0.35%를 넘을 수 없어 사실상 균형재정을 강제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독일은 2028년까지 국방비를 1000억 유로 더 증액할 때 균형재정 조항의 예외를 적용했다. 앞으로 5000억 유로의 인프라 투자펀드를 만들어 10년간 교통과 통신망 등에 투자한다. 국방비의 경우 GDP의 1% 초과 때부터 균형재정의 예외를 적용한다. GDP의 1%는 연간 450억 유로로, 독일은 이를 집행한 지 3년 만에 국방비 지출이 현재의 2.1%에서 3.5%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말 조기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기민당·기사당은 사회민주당과 연정 구성을 협상 중이며 이들은 균형재정 수정에 합의했다. 균형재정 사수를 외쳤던 기민당은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배제에 정책을 선회했다. 지난달 12일 푸틴과 통화 후 트럼프는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총재는 선거 직후 연설에서 “유럽은 독일의 리더십 행사를 기다린다. 조속한 시일 안에 유럽통합을 강화해야 우리가 점차 미국에서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온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트럼프다.
이제 유럽의 독자안보는 되돌릴 수 없다. 기존 국방비의 2배 가까이 더 지출할 터인데 이 지출을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적절한 비율로 유럽 차원에서 써야 한다. 집행위 추산에 따르면 공동 구매와 공동 개발이 부족해 연간 최대 1000억 유로의 비용이 추가 지출된다.

3세대 주력 전차 개발비용을 보면 독일의 레오파르트2A8 비용이 미국의 에이브람스보다 1000만 유로 넘게 더 비싸고 중국보다는 거의 13배 비싸다. 독일과 스페인·프랑스 등이 공동 개발한다면 이 비용이 꽤 낮아질 것이고 여러 회원국이 이를 주력 탱크로 사용하게 되면 생산할 때 규모의 경제도 가능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략 핵무기는 미국의 10분의 1도 안 돼 미국이 유럽에 제공해 온 확장 핵 억제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 주권이라며 대화를 거부했던 프랑스조차 자국 핵무기의 유럽 공유에 대해 전략 대화를 허용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유럽의 자주 안보를 촉진해 재정 통합까지 강화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버터(먹고 사는 복지)와 총의 상충 관계’는 여전히 남는다. 국방비 대폭 지출로 유럽의 경제는 조금 성장하겠지만, 복지는 삭감이 불가피하다. 저성장의 와중에 증세하려는 정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복지 삭감에 대한 유권자의 반발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