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냉면 한 그릇 더 먹는 거다

2025-07-21

살다 보면 많은 걸 알게 된다. 이를테면 꼭 돈 많은 친구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돈 없는 친구가 냉면 한 그릇 사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도. 오래전 스쳐 지나간, 하지만 무척 고마운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도 생각이 나지 않아 갚을 길이 없다.

얼마 전엔 잃어버린 지갑 속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줘서 그 안의 모든 내 재산을 고스란히 돌려준, 모르는 청년이 너무 고마워 그 전화번호로 작은 케이크를 보냈다. 덕분에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기분 좋은 날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나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의 무례함, 그 모든 무례함으로부터 한 마디의 진심이 이기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꼭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마운 사람이었는지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놓는다.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은 사람은 이름조차 잊는 게 옳다. 하긴 확률은 희박해도 그 사람이 끝까지 재수 없으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냉면 그릇 앞에 두고 동생 생각

사는 게 덧없어도 최선 다해야

만나는 모든 사람에 친절하게

더위에 숨이 턱턱 차오르던 날 친구와 냉면집에 가서 네 시 반부터 번호표를 받고 기다렸다. 먼저 온 우리 앞의 백 개의 번호도 금세 없어지고 곧 우리 차례가 왔다. 기다림보다 빨리 지나가는 삶의 축도를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돈 없는 내 친구는 돈을 좀 벌었다며 굳이 그 비싼 불고기까지 사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문득 마흔여덟인 동생과 쉰넷이던 나, 둘이 빙수를 먹으러 온 동네를 헤매던 무더운 여름밤이 생각났다. 그날 빙수는 동이 나버렸고, 빙수를 먹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오던 남매의 허전한 발걸음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팥빙수 한 그릇 먹지 못한 게 대단한 인생의 패배처럼 느껴지던 그 여름밤의 기억, 그로부터 2년 뒤의 초여름 갑자기 세상 떠난 동생이 친구가 사주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산다는 건 그저 아무것도 아니고 허물없는 친구와 수다 떨며 빙수 몇 그릇, 냉면 몇 그릇 더 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면이나 빙수 말고 여름밤 나를 위로해 주는 건 끝이 절대 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드라마를 하룻밤에 딱 한편씩만 보는 거다. 특히 중국 드라마가 그렇게 복잡다단하고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유장하다. 드라마의 교훈은 우리도 저렇게 살다 갈 거라는 거다. 드라마의 우여곡절 속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드디어 끝이 나는 것이다. 인생의 무상함에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미리 보기 하는 거다. 우리는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살다가 외롭게 죽기도 하고, 주인공 옆에 서 있는 단체 사진 속의 이름 없는 존재로 살다가 나름 행복한 생애를 마감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타이완의 전설적 가수 ‘등려군’의 전기 드라마를 보았다.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린 등려군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오래전 영화 ‘첨밀밀’에서였다. 짧지만 아름다운 생애와 지금도 우리를 위로해 주는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를 들으며 슬프고도 행복했다. 그녀가 남긴 말이 딱 내 마음 같았다. “내가 죽은 뒤에도 모두 다 내 노래를 좋아하게 할 거예요.” 나는 이렇게 바꾸어 써본다. “내가 죽은 뒤에도 모두 다 내 그림을 좋아하게 할 거예요.” 참 부질없는 꿈일지라도 예술가는 자신의 꿈을 무덤 속까지 갖고 간다. 불멸의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남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의 꿈도 그러했을 것이다.

며칠 전 정선의 탄광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삼탄 아트마인’에 작품을 설치하러 갔다. 딱 10년 전 그곳에서 기획전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미술관 대표는 아프리카를 비롯해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원시 미술품들을 수집한 놀라운 수집가였다. 독일의 탄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을 벤치마킹해 정선의 탄광을 아주 독특한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그때 나는 그곳에 놓여있던 근사한 아프리카 목조의자들과 내 그림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만 꺼내 놓고 얼마 뒤 그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딱 10년 만에 그곳에 다시 와서 돌아보니 내 눈에 밟히던 그 아프리카 의자들이 새삼 눈에 띄었다. 10년 사이 그 의자를 굳이 내 것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오래전 탄광의 막장이었던 지하로 내려가 그곳에서 일하던 가장들을 상상한다.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 시절 교사 월급의 다섯 배를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며칠 전 후배가 보내준 구절이 생각났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전혀 모르는 전투에서 각자 싸우고 있습니다.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하세요.”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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