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말할 조건이 비판받는 이들의 희생에 기대 있다면 지역을 비판하고 재단할 권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끝맺음한 글을 봤다. ‘산천어 축제의 윤리를 묻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으로 화천 산천어 축제를 지방의 관점에서 풀어낸 글이다. 문화와 지식까지 수도권이 독점한 이 공화국에서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의 즐길거리가 아니라면 이 겨울의 보릿고개를 지방은 어떻게 넘어야 하느냐는 필자의 호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축제가 계속되는 한 우린 산천어 축제의 윤리를 물어야 한다. 생존 논리가 윤리적 면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도덕의 기본을 무조건적 의무라 규정한다. 물론 칸트는 이성을 지닌 인격체만을 존중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칸트 윤리학의 중요한 단서는 인간이 동물에 대한 직접적 의무는 없지만, 간접적 의무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칸트적 해석으로 ‘동물을 괴롭히거나 학대해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적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쾌락을 위해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행위 자체가 비인간적임을 칸트는 분명히 한다. 비록 산천어를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지 않더라도 쾌락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에 어긋난다.
벤담을 끄집어내도 그렇다. 공리주의는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행복과 고통)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도덕적 고려 대상의 기준으로 이성이나 언어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제시한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산천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윤리적 계산에 넣어야 한다. 산천어 축제가 가져오는 인간의 즐거움(지역 경제 활성화, 방문객의 오락 등)과 산천어가 겪는 고통을 저울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축제를 통해 얻는 쾌락의 총합이 산천어가 겪는 고통보다 크다면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겠지만, 반대라면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이 계산이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벤담은 “문제는 그들이 이성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라고 강조하며 동물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벤담의 통찰은 동물윤리학자들이 이어받아, 쾌락을 위한 살육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결론을 이끈다.
산천어 축제 옹호 담론의 핵심에는 지역 불평등도 자리한다. 수도권이 모든 문화와 기회를 독점한 상황에서, 겨울철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자연을 활용한 축제 말고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반문한다. 언뜻 축제가 지역 입장에서 필수 불가결한 생존 전략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역 현실이 축제의 윤리적 정당성을 담보해 주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 그 행위가 수행되는 곳이 수도권이든 지역이든 본질적 평가는 같아야 한다. 단지 지역의 생존 문제와 연결된다는 이유로 비윤리적 행위가 눈감아져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본질은 생태적 전환에 있다.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위기 앞에 인간 중심주의는 재고되어야 한다. “결국,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산천어 축제의 암묵적 전제가 이제 더는 설자리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