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답하다 “팬덤·여론 정치가 세상 망친다”

2025-03-21

[박상훈 ‘고전으로 읽는 민주주의’] 플라톤의 『국가』

인간이 대면해 온 정치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은 왜 자신을 통치할 국가를 필요로 하나. 통치자에게 위임된 권력과 피통치자가 가진 권리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나.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는 왜 퇴행의 운명을 피할 수 없나.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과업을 면제받은 인류는 지금껏 없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강력한 논변을 펼친 고전이 안 읽힌 시대도 없었다. 앞으로도 읽히고 또 읽힐 것이다. 학문이란 그런 고전을 두고 평생을 씨름하는 직업이다. 그 가운데 10권을 꼽아 현대적 독해를 시도하는 것이 이 연재다. 첫 고전은 플라톤의 『국가』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방법은 많다. 보통은 올바름과 정의를 논한 책, 이상 국가와 철인 정치를 다룬 책으로 읽는다. 민주주의 비판서로 독해해도 좋다. 대중이 왜 양극화 정치나 팬덤 정치에 쉽게 빠지는지에 대한 분석서로 읽어도 재밌다.

책은 하룻밤의 대화다. 시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전성기다. 주인공은 소크라테스다. 대표적인 민주파 도시에서 열린 축제를 보고 아테네로 돌아가려는 그를 젊은이들이 막아서며 대화를 청한다. 결정은 다수의 의사, 즉 민주적 방식으로 내려진다. 대화의 무대는 어느 부자 노인의 집이다.

대중이 왜 양극단화에 빠지는지 분석

첫 대화자는 주인인 케팔로스 옹이다. 그는 빚지지 않는 삶, 남에게 구차해지지 않고 정직할 수 있는 삶이 올바르다고 말한다.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나 좋고, 신에게 봉헌하고 구원을 청할 수 있어서 생활이 경건하다 한다. 그렇게 나이가 드니 교양 있는 대화보다 즐거운 일이 없단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노년의 삶 같은데, 그런 그를 플라톤은 대화의 장에서 물러나게 한다. 당신이 누리고 있는 지금 삶은 당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부에서 온 것 아닐까. 진정 올바르고 정의롭고 가난한 노인에게 당신처럼 살라고 할 수 있을까. 평생 유복함을 즐기다 나이 들어 구원받으려는 삶을 올바르다 할 수 있을까. 저자인 플라톤은 첫 대화부터 ‘강남 좌파’ 케팔로스와 가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대비시킨다.

두 번째 대화자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다. 그 역시 열성적 민주파로, 각자에게 맞게 갚아야 정의롭다고 말한다. 상대에게는 해롭게 갚고 우리 편에는 이롭게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민족 민주주의자다. 반민주, 반민족 세력을 척결해야 정의가 바로 선다고 여긴다.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무지의 자각’을 요청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정의롭고 상대는 불의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확신은 독단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정의는 보편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진영의 논리로 상대의 절멸과 우리 편의 승리를 정의 구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양극화 정치에 대한 비판이다.

세 번째 대화자는 트라시마코스다. 그는 지식인이자 급진 민주파다. 그는 말한다. 법은 주권자의 명령이다. 참주정에서는 참주의 명령, 귀족정에서는 소수 엘리트의 합의가 법이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다. 주권자인 인민의 명령이 법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정의다. 오늘날로 보면 그는 인민주권론의 신봉자다. 무지의 문제를 무기로 삼는 소크라테스에게 면박을 준다.

주권자가 틀릴 수 있다고? 당신의 논변은 지겹다. 어느 환자가 의사도 틀릴 수 있다고 믿으며 처방을 받는가. 이때 이미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주권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이라는 주제가 이야기되고 있다. 법이 잘못일 수 있다고 해서 범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트라시마코스는 상대주의적 정의론을 과감하게 이어간다.

불의하면 안 된다고? 인간 세상을 제대로 보라. 올바른 사람이 성공하나. 정의롭기만 해서 통치할 수 있나. 어림없는 소리다. 힘없이는 정의도 없다. 상대 파당을 존중해서 결과적으로 불의가 득세한다면 그게 무슨 정의냐? 주권자가 인민이고 우리가 인민의 뜻에 따라 승자가 된다면 승자인 우리가 강자가 되고 강자인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야 인민에게도 이익이고 그게 곧 정의다. 요컨대 힘이 있을 때 상대를 ‘적폐’나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척결하는 것이 정의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반박한다. 통치는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다. 공공선의 옹호가 치자(治者)의 의무다. 당신 말대로 하면 힘으로 지배하고 상대에게 불의해야 정의다. 양 떼를 보호하는 것이 양치기에게 올바른 일이다. 양치기가 자신의 유익을 좇아 양떼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듯 자신의 유익을 위한 통치를 올바르다 할 수 없다. 트리시마코스 역시 물러난다.

이어서 완전히 다른 대화자가 등장한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다. 그들은 철학자다. 그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올바른 것에서 유익함이 나온다고 하시니 이렇게 질문하겠다. 누군가 신비의 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하자. 그 반지를 끼면 다른 사람은 나를 못 보고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 반지를 올바른 사람에게 끼워준다고 하자. 말씀대로라면 올바른 사람은 올바르기에 반지를 끼고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과연 그럴까?

세상 사람들은 힘을 갖고도 그 힘으로 편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을 올바르다고 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힘을 가졌는데 다른 나라로부터 이득을 가져오고 상대 당파를 무너뜨려 그 편익을 나눠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비난한다. 올바르게 통치하고 그래야 영혼을 관장하는 신으로부터 구원받는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냉소할 것이다. 신은 인간사에 그리 관심이 없다. 설령 불의로 편익을 얻었다 해도 구원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 앞에 가기 전에 불의하게 얻은 이익으로 헌금하고 회개하면 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현실이 이렇기에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올바르게 사는 것에는 유익함이 적고 불의를 당하는 일은 최악이다. 그러니 서로 불의를 당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 합의하는 것, 그것이 법이고 인간의 정의라고 말이다. 이 대목은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다를 바 없다. 서로에 대한 최악을 피하고자 국가를 만들고 법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에 합의하는 인간, 그것이 홉스 주장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도 않는다. 이렇게 주장을 이어간다. 그렇게 합의한 정의는 힘을 가진 자, 즉 자유롭게 편익을 추구할 기회를 제한받게 된 자로서는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롭게 보이고자 하면서도 불의를 추구할 기회를 노린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게 유익하다면 그렇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는지를 보라. 아이들에게 착하게 보이라고 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길이라 가르친다. 그런데 누군가 불의를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참지 말고 나서라 가르칠까. 괜히 그러다 너만 손해니 지나치라 하지 않을까. 최선은 지혜롭게 편익을 추구하며 들키지 않는 것, 불의하되 정의롭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현실주의적 정의론 아니겠는가.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를 데려와 치자의 역할을 맡길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 이런 정의론이 최선 아니겠는가.

시민은 자유롭되 절제하는 삶 살아야

소크라테스는 답한다. 모두가 유익함을 추구하며 올바름을 조롱하는 세상은 정치가 나빠진 결과다. 치자는 치자답고 공직자는 공직자답고 시민은 시민다워야 한다. 치자는 한 개인이나 한 당파의 마음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균형 잡힌 공동체를 이끌 지혜와 실력을 갖춰야 한다. 공직자는 공익에 헌신할 용기가 있어야 하고, 군인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기개가 있어야 한다.

시민은 자유롭되 사치보다 절제를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치자에게는 권력을 갖게 하되 그 가족이나 재산에 대한 권리는 가혹할 정도로 제한하는 반면, 시민에게는 권리를 갖게 하되 권력에 대한 야심은 갖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균형이 무너졌다. 모든 권력을 시민에게 주겠다는 팬덤 정치가가 일을 망쳤다. 그들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참주가 되려 했다. 그들은 더 많은 소비와 성장, 감세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대중은 폭식과 후회, 다이어트를 반복하는 사람처럼 열광과 냉소를 반복했다. 바른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핍박했다.

그래도 올바른 정치에 대한 소명을 버릴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의를 추구하는 정치여야 한다. 팬덤과 여론을 동원하는 사악한 인간의 정치를 감수할 수는 없다. 올바른 사람이 정치하도록 권해야 한다. 당장은 핍박받아도 그의 선함은 끝내 존중받는다고 말해줘야 한다. 불의를 통해 유익을 얻고 돈과 권세로 행복과 구원을 얻으려는 삶보다 가난해도 정의로운 삶, 당파 대신 공동체를 위한 삶, 거기에 진정 가치 있는 정치적 삶이 있다.

이를 역설하다 떠난 사람, 그가 소크라테스다. 인류가 그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임을,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공동체를 바르게 이끌 진정한 정치가가 필요하다.

☞참주정=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지배. 참주란 대중이 사랑한 독재자에 가깝다.

무지의 자각=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기에 무지를 깨닫는 것으로, 독단에 빠지지 않고 진리에 대한 책임 있는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응축한 개념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고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특유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글을 써왔다. 다작의 작가로 최근엔 『혐오하는 민주주의』 『정치적 말의 힘』 『청와대 정부』 등을 펴냈다. 유명 칼럼니스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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