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무원 역사 시험 ‘일타강사’가 눈물을 흘리며 연단에 서서 탄핵 반대를 외치는 뉴스를 보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이 있었다.
“어떤 교사도 역사 교육의 목적이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특정한 날짜와 사실들을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건으로 보이는 그 결과들의 원인이 되는 힘들을 찾고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출처는 <나의 투쟁(Mein Kampf)>. 저자는 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입대한 히틀러는 연설능력을 인정받아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후,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결합해 정권 탈취를 시도했다. ‘뮌헨 폭동’이라고 불린 쿠데타로 체포된 히틀러는 재판에 넘겨져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민족주의 성향 판사들의 호의적 반응 때문에 징역 5년이라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고, 9개월 만에 조기 석방됐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나의 투쟁>을 썼다. 극단적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반공주의로 점철된 <나의 투쟁>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히틀러는 나치당을 재정비한다. 미국의 대공황 이후 혼란스러운 독일인들은 나치당의 의견에 휘둘렸다. 권력을 쥔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범 수용소를 지었고, 이어 유대인 노동 착취와 대량학살을 위한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1936년에 지어진 작센하우젠은 나치 강제수용소 시스템의 표준이었다. 이 수용소 안에는 나치가 주장하는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과 다른 인종의 열등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세워진 생체 연구실이 있다. 하얀 타일이 붙은 실험대가 중앙에 있고, 한쪽 벽에는 시신을 빨리 이동시키기 위한 장치가 있다. 몇명이 이 위에 올랐을지는 가늠도 할 수 없다.
이제는 박물관이 된, 시신도 약품도 없는 연구실에 앉아 해 질 녘의 빛이 들어오는 걸 가만히 바라본다. 일렁이며 반짝이는 빛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히틀러가 제대로 된 벌을 받았더라면, 만약 대중들이 아이러니로 뒤덮인 책에 의문을 제기했었더라면, 비극의 역사는 없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역사 속에 숨어 있는 힘이 무엇인지, 실험대 위에 하나둘씩 올려본다.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