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지금 온통 파란색 그림뿐입니다. 이 미술가가 늘 파란색으로 작업해온 것을 모르지 않지만, 같은 색의 여러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니 당혹스러울 정도입니다. 서울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춘수(67)의 개인전 얘기입니다.
파란색 그림 하면 떠오르는 프랑스 미술가가 있습니다. 이브 클랭(1928∼1962)입니다. 클랭은 자신만의 고유 색으로 특허를 받아 이른바 ‘이브 클랭 블루’로 알려진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 안료를 사용하며 평생 200점에 달하는 IKB 회화를 완성했습니다.
김춘수는 1980년대 이후부터 30년간 파란색으로 단색조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2000년대 이후엔 특히 여러 청색 중에서도 울트라 마린(Ultra Marine)으로만 작업해오고 있고요. 전시는 2022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직을 떠난 그의 신작을 소개합니다.
파란 물감이 뒤덮은 그의 캔버스 표면은 잔잔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까이서 보면 요동치듯이 일렁이는 파란 물결 틈새로 눈 부신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합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블루냐고요. 그리고 30년 넘게 한 가지 색만 쓰는 게 지겹지 않으냐고요.
그는 “블루보다는 그 색이 지닌 투명함에 매료돼 시작했다”며 “투명함을 좇아 그걸 쌓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울트라 마린은 더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여러 청색 중에서도 형광과 보랏빛을 모두 담고 있고, ‘얌전한 청색이 아니라 약간 광기 같은 게 있는 청색’”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흰색으로 밑바탕을 칠한 뒤 그 위에 아주 옅은 파란 물감을 반복해 칠합니다. 여기에 미술가로서 그의 야심이 있습니다. 비록 평면작업이지만, 투명함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깊이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입니다.
흰색 물감으로 바탕 작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붓이 아닌 손에 물감을 묻혀 작업합니다. “어느 날 붓을 버리고 손으로 했더니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는 그는 “다른 건 다 빼자, 오로지 터치에 집중하자”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내 한계를 밀어붙여 보는 것, 이게 그의 또 다른 야심이었습니다.
남들 눈엔 ‘다 그게 그것’ 같아 보일 수 있는데, 그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안에서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붓을 쓰는 게 언어라면, 손으로 표현하는 것은 소리라고 생각한다”면서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소리로 표현해보고 싶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게 통한 걸까요. 누구는 그의 작품에서 바다를 보고, 투명에 가까운 그 색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평생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간을 쌓아온 한 미술가의 야심이 이룬 성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