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2/11/aaa17aaa-ce95-40fa-ab11-96fac7972c2a.jpg)
2018년 5월 24일. 외교안보 출입기자로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사건 두 개가 한꺼번에 터졌다.
북한은 이날 ‘핵 도발의 본진’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다. 국제기자단 20명이 갱도 폭파를 직접 목격했다.
한국에서는 외교부 출입기자단 차원에서 공동취재단을 파견했다. 당시 나는 출입기자단 간사로서 투표를 거쳐 취재단으로 파견될 언론사 선정 과정을 관리하고, 현지에서 보내온 취재 내용을 정리해 전체 기자단에 공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설마의 현실화’ 트럼프 귀환
탄핵 정국서는 기업이 주연
무리한 ‘성과용 압박’ 본말전도
취재단이 우여곡절 끝에 정부 수송기를 타고 원산으로 들어가 베이징으로 나온 3박 4일간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는 열악한 현지 통신 상황이나 촉박한 기사 마감이 아니라 이들의 안전 때문이었다. 화해 국면이었지만, 경험상 북한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 순간이 노심초사였다.
폭파 당일 취재단이 숙소인 원산 갈마호텔에서 보내온 취재 내용을 기자단에 공유하고 나도 기사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야간 마감 시간인 밤 11시가 다 됐다. 이제 큰일은 다 치렀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끄려는 순간 정신없이 백악관발 외신 뉴스속보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트럼프, 김정은과 정상회담 취소”
6월 12일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합의한 뒤에도 북한이 연일 비핵화 목표를 거부하고 핵 사용을 위협하는 등 거친 언사를 거듭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한의 “엄청난 분노와 노골적인 적대감”을 문제 삼아 회담 취소를 일방 통보한 것이다. 북한이 몸값을 높이기 위해 애용해온 ‘벼랑끝 전술’에 나서자 트럼프는 아예 판을 깨버린 셈이었다.
상황 자체도 심각했지만, 당장 원산에 있는 우리 취재단이 억류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 식은땀이 흘렀다. 현장에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기자들도 있었다. 자국민의 안전과 생명은 안중에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위험한 도박은 통했다. 북한은 백악관 발표 뒤 9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공식 입장을 내 사실상 납작 엎드렸다.
이처럼 ‘설마의 현실화’를 표방하는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이 돌아왔다, 망설임 없는 관세전쟁부터 가자지구 수용 계획까지, 임기 초 성과를 내려는 그의 드라이브는 거침없다. 더 강해졌다고도 하지만, 6년 전 그때를 돌이켜보면 사실 핵심은 같다. ‘협상 과정’에서는 그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없다는 것, 정교한 전략 없이 그를 상대했다가는 되로 주고 말로 받기에 십상이란 것이다.
우리로선 또다시 대행 체제에서 트럼프를 상대해야 하는 고난도 과제를 받았다. 정부의 역량을 결집한다 해도 대행 체제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럴 때 메인 플레이어는 기업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이야기가 들린다.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대행 체제가 불필요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대미 투자액 설정 등을 기업에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들려온다. 사실이라면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차후 국익에 손상을 가져올 월권행위다.
정상외교에 기업의 투자가 따라붙는 건 자연스럽다. 최고결정권자인 정상들이 합의하면 기업 활동도 동력을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시적인 대행 체제에서 대미 성과를 위해 기업을 활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본말전도이며, 무책임하다. 오히려 국익에 기여하는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등이 방미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대행 체제의 과도한 압박이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 들은 미 측 인사의 이야기다. 점잖게 말했지만, 권력 공백기에 구체적 투자 계획 등 정교한 전략도 없이 무작정 들이대는 한국이 당황스럽다는 기류다.
트럼프와의 면담 추진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자. 지금 그를 만난다면 만족할만한 선물을 줄 수 있나. 오히려 트럼프의 무리한 ‘위시 리스트’만 받아올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나중에 한국이 대미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 제안을 갖고 갔을 때 “이전에 이미 만나지 않았느냐”며 트럼프와 대면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최상목 대행 체제의 성공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성공이다. 국내 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본질을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