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대법원 “공공이익 관련”…파기환송
전문가 “직장 내 성희롱, 순수 사적 영역 아냐”
#중소 출판회사에 다니는 A씨는 타 기업으로 이직하면서 한 달 전 상사로부터 당한 성희롱 사실을 회사에 알릴지 고민스러웠다. 성희롱 때문에 퇴사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 문제 제기를 못 했고 엄연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이메일로 폭로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였다. 어차피 이제 회사 사람들을 볼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선택지였다. 다만 그렇게 되면 명예훼손 여지가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됐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 사실을 사내 전체 이메일로 알렸을 경우 명예훼손에 해당할까? 실제로 직장 내 성희롱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대법원은 판례에서 폭로 표현이 공개 토론에 기여하는지, 훼손되는 명예의 성격과 침해의 정도 등을 따져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피고인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술자리에서 유부남 상사가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은 게 발단이 됐다. 상사는 추행 뒤 ‘맥줏집 가면 옆에 앉아요. 싫음 반대편’, ‘집에 데려다줄게요’ 등의 일방적인 연락을 했다.
피고인은 그 상사가 성희롱 고충 상담 및 처리를 담당하는 HR팀장이기 때문에 즉각 문제 제기할 수 없었다. 2년 뒤 퇴사를 하면서 ‘성희롱 피해사례에 대한 공유 및 당부의 건’이라는 제목의 전체 이메일을 발송해 공론화한 이유였다. 피고인은 이메일에 “현 HR팀장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구체적인 추행 행위를 밝혔다.
이후 열린 사내 인사위원회에서 해당 팀장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술 취해서 그런 것 같다. 2년 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는 취지로 답했다. 이후 그는 전보 발령을 받았다. 피고인은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회사 대표이사를 상대로 진정을 제기했으나 노동청은 혐의없음(증거불충분)으로 행정종결 처리했다.
팀장은 명예훼손 혐의로 사원을 고소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팀장의 손을 들어줬다. 해당 이메일에서 피고인은 행위 시점을 밝히지 않아 최근 성추행 행위로 회사를 떠나게 된 것처럼 오인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그 표현이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달랐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사례는 구성원들의 공적인 관심사라며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봤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과 피해구제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는 피고인의 취지도 고려됐다. 대법원은 “설령 부수적으로 다른 사익적 목적이나 동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비방할 목적이 있다는 점에 대해 범죄의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아, 원심을 법리오해를 이유로 파기환송한다”고 밝혔다.
해당 사건을 비롯해 성희롱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두려워해 즉각 공론화를 망설이기 마련이다. 참으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사를 계기로 알리는 경우가 그리 예외적이진 않다.

법조계에 따르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고의성이 있어야 한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 역시 마찬가지다. 대법원은 명예훼손 관련 판례에서 ‘드러낸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할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비방할 목적은 부정된다’고 규정했다. 동시에 표현으로 훼손되는 명예의 성격과 침해의 정도 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하고, 행위자의 동기와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 부수적으로 다른 사적 동기가 포함돼 있어도 비방할 목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권오상 노무법인 유앤 공인노무사는 이 사건 판결이 성희롱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했다. 동시에 노동부가 행정종결 처리한 판단에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직장 내 성추행이나 성희롱 문제는 회사 조직뿐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으로 순수한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며 “피해자가 성희롱 피해를 이메일 등으로 제 3자에게 알릴 경우 그 내용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면 쉽게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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