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선 마트도 마음대로 못 갈 듯”…출국 앞둔 노동자 걱정·불만 고조
대기업, 협력업체에 비자 부담 전가 “인건비 아끼려다 생긴 일” 비판도
현지에 가족 보낸 시민 “밤잠 설쳐” 노동계 “인권 유린한 미국, 사과를”

9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비자 신청 출입구 앞에서 만난 홍모씨(43)는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인 구금 사태에 관해 묻자 인상을 찌푸렸다.
홍씨는 한국 기업의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아내와 함께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홍씨는 이날 무사히 비자를 발급받았지만 불안한 기색은 여전했다.
“이민자라는 이유로 잡아가면 그게 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걸어다니는 것도, 마트에 가는 것도 불안하죠.” 옆에 서 있던 홍씨의 아내 박한솔씨(36)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구금되면서 한국 내 시민, 노동자들도 불안과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와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씨는 “트럼프 정부 들어서 이민자에 대한 단속이 과도해진 것 같다”면서 “한국이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맺었는데도 이런 문제가 불거진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
당분간 미국에 갈 일은 없어도, 미국에 가족이나 친지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A씨(65)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분위기가 살벌하다’고 말해서 걱정된다”면서 “영주권이 있는 사람들도 내쫓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주노동자의 불안한 지위가 드러났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이 해외 투자 기업들에 충분한 취업 비자를 보장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대기업이 이와 관련된 부담을 협력업체에 상당 부분 떠넘겨 결국 협력업체 등의 노동자들 인권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시민인 남편을 따라 출국을 앞둔 김동희씨(28)는 “이번 사태는 한국 기업이 인건비를 아끼려는 과정에서 불법체류를 방치하다가 일어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이민당국의 이번 단속으로 체포된 한국인 노동자들 중에는 하도급 협력업체 직원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는 민주노총과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등 주최로 긴급 기자회견이 잇따라 열렸다.
박석운 전국민중행동 공동대표는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이주노동자에게 인권을 유린하는 가혹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이라며 “미국은 국제 인권 기준을 위반한 것을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이 정한 수용자 처우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사슬, 발목 구속 장비 등은 수용자라 해도 사용할 수 없다.
한국에 와 있는 네팔 출신 노동자인 우다야 라이 민주노총 이주노동조합 위원장은 “잘못은 기업과 정부, 제도에 있는데 왜 맡은 바 일을 했을 뿐인 노동자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면서 “단속과 추방은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넘어 공동체, 지역사회, 경제 전체를 멍들게 한다”고 말했다.
수용된 한국 노동자들은 이르면 10일 전세기를 타고 귀국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