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트럼프다. 지난달 20일 제47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과 연이은 행사는 화려했다. 특히 백악관 인근 체육관, 2만여 명의 지지자 앞 무대에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은 책상에 행정명령 문서들을 쌓아놓고 마치 콘서트처럼 ‘서명 쇼’를 벌였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상징되는 트럼프의 ‘미국 최우선주의’는 이제 기술·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행정명령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기술·산업 앞에선 민주·공화 한뜻
트럼프의 서명 쇼가 바이든 정부의 정책을 지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관세와 규제를 통해 제조업과 공장을 미국 안으로 유입하고 산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방향성은 다르지 않다. 트럼프 정부는 그 방향에 박차를 가한 것. 기술과 산업 앞에선 초록이 동색인 게다. 바이든 정부의 임기가 저물던 지난 1월 3일로 돌아가 보자. 일본제철이 US스틸을 149억 달러(약 21조원)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불허하는 행정명령이 발표됐다. 이 발표는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심사와 철회 요청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철강산업이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관점에서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철강에서 시작돼 철도·자동차와 건설, 나아가 오일·가스, 여행·관광 등 사람의 이동을 지원하는 산업은 사실상 20세기 경제발전을 이끈 동력이었다. 그래서 경제학자 브래드퍼드 들롱은 철강을 “20세기 산업문명의 핵심 소재”라고 소개한 바 있다. 바로 그 철강산업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기업 합병에 대해 미국 정부가 개입하여 급제동을 건 것이다.
미국, 일본의 US스틸 인수 불허
바이든·트럼프 다르지 않아
“철강산업은 국가 안보에 중요”
필요할 땐 정책개입도 정당화
1901년 금융자본가 J.P 모건의 철강회사와 산업자본가 카네기의 회사가 통합하여 탄생한 US스틸은 당시의 혁신기술인 베세머 전로 도입, 평로제강법 채택, 일관제철소 운영 등으로 산업 발전을 선도한 기업이다. 비록 2차 오일쇼크 이후 살아남기 위해 석유·에너지로 사업부문을 다각화하였고, 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없이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노쇠한 기업으로 잊혀가고 있지만, 철강왕 카네기가 추구했던 기술력과 자국 시장 지배력은 오랫동안 미국 제조업의 근간이었다.
CFIUS는 ‘외국인 거래가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거가 있는 경우 대통령이 거래를 직접 중지 또는 차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975년 현재와 같은 구조를 갖춘 이래 해외자본 거래를 막은 것은 이번이 아홉 번째이다. 1990년 중국 국가항공기술수출입공사의 미국 항공기용 부품기업 맘코 인수 불허가 최초 사례였으며, 2017년 원전 설비업체 웨스팅하우스의 중국 매각 불허도 있었다. 보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2018년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금지 명령이 있는데, 브로드컴은 화교 자본의 지분율이 높은 싱가포르계 회사로 알려져 있다. 강력한 정책개입의 근거는 기술 유출에 따른 국가 안보 우려였다. 해외 투자로 인한 경영권 변동으로 핵심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고 이는 자국 산업 공급망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행정부가 거래를 차단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산업 보호 위한 정부 개입 중시
더 나아가 이번 행정명령은 중국 자본과 관련 없는, 소위 동맹국 간 기업거래에 대한 금지명령이라는 점에서 아주 이례적이다. 미국 내 철강 및 수요산업의 표를 의식한 정치적 셈법이, 전통적 동맹관계와 경제적 합리성에 근거한 판단보다 우선시 되었다는 지적이다. 바이든 당시 대통령은 공식 성명에서 “US스틸이 미국 소유로, 국내에서 운영되는 철강회사로 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혔으며, 트럼프 대통령 또한 “인수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물론 작년 말 대선을 앞두고 주요 경합 주였던 펜실배이니아 주의 표를 고려한,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산업과 기술에 대해서 양당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일부 미국 언론은 ‘CFIUS의 부패’ 또는 ‘국가안보로 위장한 산업정책’ 등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하튼 기술주권과 국가전략 관점에서 외국인 투자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CFIUS의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에서 기술주권(technology sovereignty)이라는 키워드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보통 기술주권이란, ‘국가 경쟁력과 국민 복지를 위해 필요한 핵심 기술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으로 정의된다(서울대 이정동 교수). 앞서 미국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국가안보의 필수적 고려사항은 자국 산업의 공급망과 기술 리더십이다. 산업 공급망의 대체 가능성 또한 현실적으로 자국의 기술력에 의존하고 있으니, 기술은 국가안보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기술패권의 시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술이 많아지고 있고 내수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팔고 싶지 않은 산업에 대한 정책적 개입이 정당화되고 있다. R&D 투자를 통한 핵심기술의 자체개발은 여전히 중요한 정책수단이겠지만, 보다 폭넓은 전략적 기술 확보와 기술협력 기반의 산업·외교 전략이 요구된다.
◆박찬수=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기술정책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기술전략에 관한 경험을 쌓았으며, 지금은 과학기술정책과 산업 현장을 연결하는 국가혁신정책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유공 대통령 표창(2020)을 받았고, 현재 STEPI 부원장을 맡고 있다.
박찬수 STEPI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