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순 중앙대학교 이사장

지난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자리한 중대부고 대강당. 강남 8학군 소속인 이 학교 1학년 학생 360여 명과 교사 등이 진로 특강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차 중 하나가 한국산 K2 전차이고, 그 심장(엔진)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강사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자 장내에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이날 강연자는 이현순(75) 중앙대 이사장. ‘대한민국 자동차공학 박사 1호’다. 알파·베타·감마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차그룹의 엔진 자립과 K엔진 수출을 이끈 주역이다. 두산그룹 혁신부문 부회장을 맡으면서 K2 전차의 엔진 국산화를 지휘했다.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에서 기계공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세계 최고 자동차 회사인 미국 GM에서 일하다가 1984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의 스카우트 제의에 귀국을 결심했다. 월급이 3분의 1로 줄었지만 “국산 엔진 개발에 매진해 달라”는 설득을 받아들였다. 이후 경기도 용인 마북리 연구소 부지 선정부터 연구직 신입사원 선발, 4년여에 걸친 알파 엔진 개발 등을 진두지휘했다. 국산 엔진을 개발한 공로로 2021년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는데, 이는 지금까지 선정된 91인 중 최연소 기록이다.

그는 특강에서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남들이 안 하는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이 엔지니어의 특권”이라며 “여러분 중에서 나를 뛰어넘는 엔지니어가 배출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의대 광풍’ 시대에 ‘공대 진학 전도사’를 자처한 이 이사장을 특강에 앞서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에서 인터뷰했다.
‘공대 진학 전도사’를 자임했다.
“GM에서 일하다 돌아왔을 당시엔 한국의 엔지니어 수준이 굉장히 우수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실력이 떨어지더라. 이유를 살펴보니 머리 좋고 창의력 있는 학생들이 공대 대신 의대에 진학하는 거였다. 질병 진단이나 치료 기기를 개발하는 의과학자가 아니라 대부분은 임상 의사였다. 자동차로 치면 엔지니어는 자동차를 설계하고, 신차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임상 의사는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는 정비사 같은 역할이다. 의사가 평생 수천 명의 생명을 살린다면, 엔지니어는 수억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인생 멋지게 살려면 엔지니어에 도전하라”고 권유하게 된 계기는.
“2010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서 운영하는 삼성·SK·포스코 등 대기업 최고기술책임자들 모임인 ‘CTO 클럽’의 대표 간사를 맡았다. 공대 졸업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으로 몰릴 때라 신기술 토론이나 친목 다지기 차원을 넘어 ‘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까’ 고민했다. 전국의 대학을 찾아다니며 ‘엔지니어의 삶’을 주제로 특강을 시작했다. 지금은 강사진이 100여 명으로 늘었고, 5개 대학엔 정규 강좌로 도입됐다. 누적 강의는 570회를 넘었다.”
대학생에서 고교생으로 대상을 확대한 것인가.
“그런데 고교 특강은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시간 빼기가 어렵더라. 무엇보다 학부모들의 거부감이 크다. 성적이 뛰어난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고 하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 공대 가라고 권유한다고 여기더라. 그래서 요즘엔 과학고나 영재학교를 주로 찾아간다.”
공대에 가야 하는 논리를 어떻게 설파하나.
“엔지니어의 삶은 남이 안 가본 길을 가는 거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제품을 선보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다. 기술특허 같은 보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그게 의사의 삶보다 낫다는 얘기를 해준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자부심을 강조한다. 어떤 한 분야에서 내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대에 가서 의과학을 공부해 새로운 의술을 연구하고, 신약이나 수술로봇 개발에 도전하는 것도 같은 의미겠다.”
학생들이 가장 관심 갖는 대목은.
“돈을 얼마나 버냐고 가장 많이 묻는다(웃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높다. 의사보다 월등하게 많다’고 답해준다. 한국의 부자 50명 리스트를 보여주면서 ‘자수성가한 부자는 대부분 공대 나온 창업가’라고 알려준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2019년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32억원이 넘는 보수를 받았다. 앞서 84년 현대차로 옮긴 이후 2011년 퇴직하자 기다렸다는듯 GM이 그에게 백지수표를 내밀며 ‘원대 복귀’를 설득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MB)은 핵심 인재의 해외 유출을 우려했는데, 이 이사장은 MB를 만난 뒤 “외국 기업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윤석열 정부 시절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 30% 삭감의 후유증이 크다.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은 연구비가 급감해 2년째 혼돈 그 자체다. 기술 진보가 빠른 과학기술계에서 2년이면 진짜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다. 국가의 미래를 파괴하는 뼈아픈 사고를 친 거다.”
그러면 R&D 예산 30조원은 어떻게 쓰여야 하나.
“지금은 지나치게 퍼주기 식이다. 세금으로 조달되는 R&D 예산은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에 오르기 위한 시드머니(종잣돈) 역할을 해야 한다. 예컨대 우주항공, 차세대 반도체, 양자컴퓨터 같은 미래 먹거리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그 와중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해 ‘의대 광풍’에 기름을 끼얹었다.
“의대 광풍의 시작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기업들이 어려워지자 연구원부터 해고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한 세대가 학부모가 되자 ‘엔지니어는 파리 목숨이다. 자식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고 자리가 안정적인 의사 시켜야겠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런 흐름이 단기간에 개선될 것 같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바뀌면 성공이다.”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에 따르면 세계 30위권 대학에 한국 대학은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 서울대도 31위에서 38위로 밀렸다.
국내 대학들의 랭킹이 계속 밀린다.
“이유는 뻔하다. 대학 등록금이 올해로 17년째 동결이다. 명색이 대학 교육인데 영어유치원 수업료의 절반 수준이라니, 이래서 어떻게 세계적인 대학과 경쟁을 하겠나. 미국 하버드대나 MIT의 연간 등록금은 8만 달러(약 1억1000만원)다. 그 돈으로 세계 최고 석학을 모셔간다. 한국은 750만~850만원쯤 된다. 이러면 사람을 제대로 못 뽑는다. 요즘 인기 최고라는 인공지능(AI) 전공 교수는 대부분 싱가포르·홍콩이나 중국 칭화대로 간다. 좋은 학생은 의대에 뺏기고, 좋은 교수는 외국 대학에 뺏기는 게 현실이다. 등록금부터 자율화해야 한다. ‘반값 등록금’이라고 하면 정부가 대단한 선의를 베푸는 것 같지만 득보다 실이 수백 배 크다. 족쇄는 또 있다. 수십 년 전에 만든 학과 정원이 동결돼 있으니 수도권 대학들은 AI 학과를 만들지 못한다. 이렇게 방치하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
과학기술 인재 유출을 막을 대책은.
“문재인 정부 시절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 때문에 원전 기업들이 상당히 힘들었다. 그때 원전 개발자들이 기존 월급의 3~4배를 받고 중국 기업으로 옮겼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원자력 산업도 중국이 한국을 앞지를 수 있다. 인력 유출을 막으려면 일본 토요타의 재고용 사례를 주목할 만하다. 토요타는 정년퇴직자를 선발해 자율주행 개발, 품질 개선, 신입사원 교육 등에 투입한다. 처우는 기존 임금의 50~70%다. 이런 재고용 시스템은 기업 경쟁력도 키우고 인재 유출도 막는 대안이 된다.”
고교 돌며 “의대 대신 공대 가라”
자수성가 부자 대부분 엔지니어
등록금 등 규제 풀어야 대학 발전
신기술 30년 앞 봐야 블루오션 차지
미·중 패권 전쟁의 핵심은 미래 기술 선점이고, 그 중심에 최고급 두뇌 확보 전쟁이 있다.
“지난 1월 중국이 ‘딥시크(DeepSeek) 쇼크’로 세상을 놀라게 한 데는 배경이 있다. 량원펑(딥시크 창업자)은 저장대 출신의 ‘중국 토종’이다. 그만큼 자체 경쟁력이 높아진 것이다. 중국에서 매년 쏟아지는 공대 졸업생이 300만 명이다. 경제적으로 최고 예우, 사회적으로도 영웅 대접을 해준다. 어릴 때부터 명문 공대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중국이 무서운 이유다.”
이재명 정부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공약했는데.
“지방 대학을 서울대 수준으로 키운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보면 좋은 대학이 많아지니까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렇지만 국화빵 찍어내듯 똑같은 대학을 10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느 대학은 AI, 다른 대학은 우주항공 식으로 미래의 인력 수요를 반영해 특성화하고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GM(3년)과 현대차(27년), 두산(11년)을 합치면 그가 엔지니어로 걸어온 기간은 장장 41년이다. 여기에 울산과학기술원(UNIST) 이사장(2015~2023년)에 이어 중앙대 이사장(2023년 말~)으로서 교육자 겸직 기간도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이 제일 강하다.
엔지니어로서 소명과 매력은.
“94년, 그러니까 31년 전에 수소차 개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당시 중앙일보에 보도됐다.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수소차를 개발하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신기술은 30년 앞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것이다. 개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남보다 먼저 투자해야 블루오션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다. 그게 엔지니어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