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자민당 총재가 21일 총리로 공식 선출됐다. 새 내각의 주요 인선과 개혁보수 성향의 일본유신회와 지난 20일 체결한 연립정권 합의문을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아시아 각국과의 관계 구축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적 신념보다 현실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우선한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자민당과 일본유신회의 합의문은 A4 용지 8쪽 분량에 달했다. 2012년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며 ‘평화의 당’을 내세운 공명당과 맺은 2쪽짜리 합의문과는 대조적이다.
이번 자민·유신 합의문에서 가장 주목받은 대목은 연립정권 합의에 이른 이유를 밝힌 서두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자립하는 국가’로서 일·미동맹을 축으로 극동의 전략적 안정을 뒷받침하고, 세계 안보에 기여한다”고 밝히면서 “양당은 현실주의(리얼리즘)에 기반한 국제정치관과 안전보장관을 공유한다”고 선언했다. 새 정권이 외교·안보를 중시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에서도 방위력 강화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2027년까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늘리겠다는 ‘국가안전보장전략’(2022년 제정)의 조기 개정, 반격능력(적기지 공격능력)을 갖춘 장거리 미사일 정비 등이 포함됐다.
와타나베 쓰네오(渡部恒雄) 사사카와평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이런 정책들은 공명당과의 연립 때는 내놓을 수 없던 것들”이라며 “아베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국제 환경의 변화에 맞춘 안보 정책 추진을 자신의 정치적 레거시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보수층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 이념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정책에서는 균형 잡힌 실용외교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이 우려하는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정권의 노선은 내각 인선에서도 드러난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는 외상,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는 방위상, 기하라 미노루(木原稔)는 관방장관으로 각각 기용될 것으로 알려졌는데 모두 자민당 내 중도보수 성향 인사로 분류된다. 총무상으로 기용될 것으로 알려진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도 외교·안보 분야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중국과 두터운 인맥을 가진 인물이다.
기하라를 제외한 세 사람은 다카이치 총리와 가까운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 지난 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경쟁했던 인사들이다. 다카이치 총리가 이들을 내각에 기용한 것은, 내부 견제를 줄이고 당내 기반을 확장하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국내외에 안정감을 주는 인선”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첫 외교 무대, ‘무난한 데뷔’ 될까
취임 직후 다카이치 총리는 곧바로 외교 무대에 나선다. 오는 27~29일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에 이어, 31일부터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이 잡힐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일본에 방위비를 GDP 대비 3.5% 수준으로 늘릴 것을 비공식적으로 요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외교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를 구축하려면, 그의 관심사를 미리 파악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경험칙이 통한다. 다카이치 정권이 추진 중인 일련의 방위력 강화 정책 역시 ‘트럼프 대응’의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이 대통령,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한 역사 인식 문제를 일단 ‘봉인’하고, 신뢰 구축에 나설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아베 전 총리는 2013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한국,중국과는 물론 미국과의 관계까지 악화시킨 바 있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 연구원은 “과거 아베 전 총리는 당내 강력한 기반을 바탕으로 지지율도 높았던데 반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며 “공명당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여전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담 의지를 보이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일·한이 협력해 일·미·한 3국 협력을 진전시킬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한국과 굳이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보수색은 국내정책에서… 실현은 쉽지 않아
반면, 다카이치 총리는 국내 정책에서 자신의 보수색채를 드러내려는 심산으로 보인다. 일본유신회와의 합의문에는 헌법 9조 개정을 위한 협의체 설치, 스파이방지법 제정 검토, 외국인 정책 담당 대신(장관) 신설 등이 명시됐다. 또 보수층이 강하게 반대하는 선택적 부부별성(부부가 결혼 시 성을 통일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 도입 대신, 이를 대체할 법안을 마련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런 정책을 내세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 시절부터 자민당을 떠났던 ‘강경 보수층’을 다시 결집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 정책 대부분은 야당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특히 헌법 개정은 중·참 양원 모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해, 현실적으로는 실현이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