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인터넷신문]가을 산자락에서 보랏빛 절굿대꽃이 흔들린다. 바람결에 부딪히는 꽃송이는 오래된 현악기의 현처럼 낮게 떤다. 그 잎으로 만든 떡, 나주 절굿대떡은 자연과 인간이 느림의 리듬으로 함께 써 내려간 한 곡의 음악이다. 그 한입의 풍미 속에는 세월이 빚은 시간의 깊이, 그리고 바흐의 샤콘(Chaconne)이 가진 영혼의 울림이 숨어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음악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 믿은 작곡가였다. 그의 샤콘은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2번의 마지막 악장으로, 약 60여 번의 변주가 단 하나의 저음 선율 위에 반복된다.
이 곡은 단순한 기교의 음악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바흐가 인간의 고통과 신의 질서를 동시에 통과하며 써 내려간 삶의 명상록이다. 절제된 반복, 느린 상승, 그리고 끝없는 변주가 만들어내는 깊은 울림. 그것은 곧 ‘시간의 예술’이었다.
나주 절굿대떡의 풍미 또한 이 샤콘의 정신과 닮아 있다. 절굿대잎을 따서 말리고, 비비고, 찧고, 또 말리는 과정은 단조롭지만, 매 순간의 손끝마다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만 매번 감정이 달라지는 바흐의 음악처럼, 절굿대떡의 향과 찰기는 그날의 햇빛과 바람, 손의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나주의 어르신들은 절굿대떡을 “찰지고 귀한 떡”으로 기억한다. 절굿대의 잎 뒷면에는 흰 털이 빽빽한데, 이 섬유질이 떡의 질감을 쫀득하게 하고 향을 머금는다. 절굿대떡을 만들기 위해 산에 올라 잎을 따고, 덕석에 말리고, 손으로 비비고, 절구에 찧는 과정은 음악의 박자처럼 일정하다.
어머니들의 손은 악기였다. 손끝의 리듬, 팔의 움직임, 그리고 절굿대잎이 덕석 위에서 내는 바스락거림이 모두 음표가 되었다. 바흐가 한 줄기 베이스 선율 위에 감정의 변주를 얹듯, 어머니들은 매해 같은 절굿대 위에 다른 정성을 얹었다. 풍미는 바로 이 손끝의 반복에서 태어났다.
절굿대떡은 느림의 예술이다. 절굿대잎을 하루 동안 물에 담가두고, 찹쌀을 12시간 불린다. 삶은 절굿대를 고두밥에 섞어 찧기 시작하면 북소리 같은 장단이 부엌을 울린다. 그 소리는 남도의 장단처럼 느리고 단단하다. 손의 반복이 일정한 리듬을 만들고, 떡이 점점 부드러워질수록 향이 깊어진다.
급히 만들면 질기고, 서두르면 향이 사라진다. 기다림이 풍미를 만든다. 바흐의 샤콘이 한 음 한 음 절제된 속도 속에서 천천히 쌓아올라가듯, 절굿대떡도 시간과 온도의 조화를 통해 완성된다. 절굿대의 은은한 향과 쫀득한 질감은 그 느림이 남긴 여운이다.
절굿대떡의 풍미는 산과 인간의 협주곡이다. 절굿대가 자라는 산의 바람, 햇살, 흙의 냄새는 모두 악보의 음표가 된다. 절굿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산이 첫 음을 내고, 어머니의 손이 그 위에 화음을 얹는다. 떡을 찧는 소리와 리듬, 콩고물을 입히는 손놀림은 현악기의 여운을 닮았다. 부엌은 그 자체로 작은 연주회장이 되었고, 떡이 완성되는 순간 느린 선율의 피날레가 울려 퍼졌다.
이제 절굿대떡은 거의 사라졌다. 절굿대를 따는 손도, 덕석 위에서 잎을 비비는 풍경도 사라졌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은 사라진 것을 다시 연주하는 데 있다. 잊힌 악보를 다시 펼치듯, 절굿대떡을 복원하는 일은 단순한 음식 재현이 아니라 문화의 소리 복원이다. 절굿대를 다시 심고, 그 잎을 손질하며, 떡을 찧는 손길이 이어질 때, 우리는 남도의 ‘샤콘’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절굿대떡의 풍미는 미각이 아니라 기억의 음악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느림의 화음, 그것이야말로 절굿대떡이 전하는 예술의 본질이다. 바흐의 샤콘은 인간의 한계 속에서도 신의 질서를 찾아가는 음악이다.
나주 절굿대떡의 풍미 역시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정성이 함께 빚은 맛이다. 한입의 떡에서 들리는 느린 선율은 남도의 가을이 연주하는 시간의 음악이다. 보랏빛 절굿대가 가을을 빛내는 계절, 한 조각의 떡을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서 퍼지는 그 풍미는, 바로 바흐의 샤콘과 같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수묵화의 여운.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4).
허북구. 2025. 나주 곰탕, 영화 시네마 천국을 닮은 맛.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3).
허북구. 2025. 나주 곰탕의 풍미와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