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왔다. 비가 오면 씨를 뿌리고 해가 길어지면 수확했다. 그리고 그 결실의 순간마다 축제를 열어 노래하고 음식을 나누었다. 추석이나 추수감사절, 또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제사들까지 모두 같은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먹을 것을 얻는 일은 생존의 문제였지만 그것을 함께 기뻐하는 일은 인간이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문화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인간이 계절의 순환을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의례를 통해 시간의 구조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수확제는 자연의 리듬을 사회의 리듬으로 바꾸는 장치였다. 이 장치 덕분에 사람들은 불확실한 자연 속에서도 예측할 수 있는 질서를 느꼈고, 한 해의 끝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수확의 축제는 곧 사회가 스스로에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언어였다.
축제의 의미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깊다. 평소에는 분리되어 있던 가족, 계급, 혹은 씨족이 이 시기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재화를 돌렸다. 위로와 모스가 말했듯, 제사는 경제적 순환을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제도였다. 곡식이나 고기를 나누는 행위는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재분배의 의례’였다. 그래서 수확의 기쁨은 언제나 ‘함께 먹는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렵이나 유목 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북극의 이누이트는 고래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감의 영혼을 위로하는 ‘블래더 축제’를 열었고, 몽골 유목민들은 가축의 젖이 풍성한 여름에 하늘신에게 감사의 제를 올렸다. 밭이 없는 사회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얻어낸 생명의 자원을 ‘수확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도 축제는 살아남은 자들이 다음 주기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의 주기에서 점점 멀어지고 식탁의 음식은 계절을 잃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가족과 모여 음식을 나누는 행위, 잠시 일을 멈추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습관은 모두 이 오래된 리듬의 잔향이다. 수확의 축제는 단순히 농경의 흔적이 아니라 생존의 불안을 의미로 바꾸려는 인간의 오랜 기술이었다.
우리가 지금 다시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는 더 이상 가뭄과 흉년에 직접 흔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다른 형태의 불안 속에 살고 있다. 경제적 위기, 관계의 단절,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현대의 기근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명절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남기 위한 문화적 장치로서 의미가 있다.
송편, 월병, 칠면조는 결국 같은 말을 건넨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살아남고 있다고.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며 그 순환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그러니 수확의 축제를 단순한 휴일로 흘려보내지 말자. 그것은 과거의 풍습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생존을 노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옛 방식 그대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왜 그런 축제를 만들어냈는지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 의례나 민속의 잔재가 아니라 불안을 견디는 인간의 기술이었다. 우리는 수확의 기쁨을 통해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확인했고 동시에 공동체 속에서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니 오늘날의 명절도 과거처럼 수확물을 쌓아두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관계의 수확기’가 되어야 한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 인간은 다시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